닫기

[강성학 칼럼]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리더십: 신보수주의의 챔피언(3)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50803010000523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5. 08. 03. 17:33

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1982년이 되자 로널드 레이건은 자신의 대통령직에 대한 스타일을 세웠다. 그것은 대통령직에 대한 새로운 유형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국정 방향을 정하고 주요 결정을 하는 반면에 실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다. 그는 새로운 CEO 슈퍼맨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그는 보좌진을 몰아세우기보다는 보좌진에 의존적이었다. 그의 첫 임기 동안에 그가 의존한 보좌진은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 마이클 디버(Machael Deaver), 그리고 에드윈 미즈(Edwin Meese)로 구성된 일종의 '삼두마차(troika)'였다. 행정과 결정의 임무를 보좌진에게 위임하는 것은 레이건에게 굉장한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균형을 유지하고 그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허용했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그의 업무와 거리를 두는 운영이 책임을 분산하는 데 봉사했다. 비록 그가 비밀누설에 관해 불평했지만 레이건은 보좌진들이 미디어의 관심을 추구하거나 개인적 관계의 배양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레이건 대통령은 감세, 방위비 지출,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와 같은 영역에서 그의 부하들은 레이건이 염원하는 어떤 것을 수행하려고 했다. 레이건이 분명한 견해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프레임워크가 덜 적용되는 영역에서는 그는 종종 곤란에 처했다. 그는 대체로 중국의 변화를 놓쳤다. 왜냐하면 그 주제에 관한 그의 과거 중국관계는 타이완을 위한 지원을 유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이건은 아프리카 국가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가 그 나라를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을 지지했다. 그의 가장 위험스러운 단순화된 표현은 중동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모든 테러행위의 책임을 소련에게 돌렸다. 그는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가다피(Muammar Gaddafi)를 소련의 대리인으로 보았다. 그는 미 해병대를 베이루트에 보냈다. 왜냐하면 그는 레바논을 동서갈등의 전투장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미 해병대는 꼼짝 못 하는 공격목표가 되었다.

레이건은 대통령으로서 첫 기자회견에서 소련인들이 세계혁명에 몰두하고 있다고 소련의 장기적 의도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레이건은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해의 단순성을 표출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전임자들의 긴장완화 정책을 군사적 지배의 정책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핵억제가 실패하고 소련과의 전략적 핵전쟁이 발생한다면 미국이 승리할 것이며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에 유리한 조건에서 적대성을 아주 초기에 추구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익은 이런 새로운 정책을 강경하고 건전하다고 간주했다. 좌익은 그것을 호전적이고 위험한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도덕적 압력의 결합이 소련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아주 색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소련체제가 견디어 낼 수 없는 수준으로 핵 군비경쟁을 확대함으로써 그것을 역전시키길 희망했다. 누출된 국방지침은 불균형의 비용을 부과하고, 주요 군사적 경쟁의 영역을 개문하고 과거 소련의 투자를 진부하게 만드는 새로운 고도의 기술적 무기개발을 요청함으로써 이런 아이디어를 표현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우주에 기지를 둔 무기체제를 언급했다.

공산주의의 몰락에 관한 레이건의 기대는 냉전의 전략을 주도하는 핵심적 지위에 임명된 신보수주의자들의 견해와 모순되었다. 유엔대사인 진 커크패트릭(Jeane Kirkpatrick)은 소련이 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행정부에 참여한 다른 신보수주의자들도 공산주의가 되돌릴 수 없다는 유엔대사의 견해를 공유했다. 레이건은 그들에게 도전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정책에 별로 관계가 없는 이론적인 논쟁을 원하지 않았다. 군비통제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 견해를 공유했기 때문에 그의 목표가 공산주의의 몰락인 반면에 신보수주의자들의 목표는 소련행위의 수정이라는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건은 공식 성명에서 소련이 망할 운명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서방세계는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할 것이다. 그것은 인류역사에서 그것의 마지막 페이지들이 아직 쓰이지 않은 어떤 기이한 장이 될 것이다.

레이건의 첫 희망은 폴란드에 집중되었다. 그곳에서 솔리대러티(Solidarity) 노조운동은 소련이 지원하는 정권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들의 경제는 폭발 직전이었다. 폴란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뒤에 레이건은 크게 흥분했다. 미국은 이 반공혁명이 실패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의 선택이 제한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레이건은 솔리대러티에 비밀 원조와 온건한 경제제재를 가하기로 했다. 연계전략으로 알려진 정책하에서 군비통제협상과 무역합의는 별개의 목적이 아니라 보다 나은 행위를 위한 보상으로 처리될 것이다. 처벌에 관해서는 보다 모호했다. 장기적으로 소련의 행위가 폴란드의 침공과 같은 형태로 더 악화된다면 미국은 극단적인 조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 레이건의 가장 큰 지지는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로부터 왔다. 레이건은 1975년 영국의 여행에서 그녀와 우정을 형성했다. 그때 그녀는 보수당의 지도자였다. 이 결속은 그녀가 수상 취임 후 1개월 만에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그리고 1981년 여름에 다시 갱신되었다. 보다 포괄적인 영국의 복지국가에 대한 대처의 공격은 세계가 지구적으로 반국가적 조류를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을 격려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서유럽의 민주적 사회주의와 동방의 공산 폭정체제를 구별하려고 애를 썼다. 레이건은 소련 실험의 부패를 계속해서 논의했고 지도자들을 정당화할 평화적 수단이 없는 것은 그 체제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행군은 자유를 경시하고 인민들의 자기표현에 재갈을 물리는 다른 폭정이 그랬던 것처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역사의 잿더미에 남길 것이라고 레이건은 말했다. 레이건의 보다 유명한 같은 견해의 표현은 1983년 3월 올랜도(Orlando)에서 복음주의자 전국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위한 연설에서 나온 그의 "악의 제국(Evil Empire)"라는 말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현대세계에서 악의 초점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소련과의 직접대결은 예외적이었고 대부분의 강화된 갈등은 제3세계의 대리인을 통해서 발생할 것이다. 그것은 레이건 독트린(Reagan Doctrine)이라고 알려졌다. 미국의 입장을 취해야 할 가장 긴급한 장소는 니카라과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떨어졌고 소련이 공격 리스트를 갖고 있는 중미(Central America)였다. 레이건은 이것을 특히 위험스러운 신호로 보았다. 레이건은 니카라과 정권의 위험성을 과장하고 우익 반란세력인 콘트라스(Contras)의 덕목도 과장했다. 소련과 갈등을 일으키는 대리인들의 다른 전투장은 아프가니스탄과 앙골라였다. 레이건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카터 대통령의 반응이 너무 지나치게 약했다고 믿었다. 카터는 곡물수출금지와 1980년 올림픽 게임 참가를 거부했었다. 레이건은 중앙정보국이 아프가니스탄 점령의 저항군에게 스팅어 미사일(Stinger Missile)을 제공하도록 승인했다. 쿠바와 소련의 고문단들이 잔인한 탈-식민 내란에서 마르크스 정부를 지원하고 있던 앙골라에서는 중앙정보국이 앙골라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조나스 사비미(Jonas Savimi) 국가통일 단체에게 무기와 다른 원조를 제공했다. 추가적인 원조가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과 싸우는 캄보디아인들에게 제공되었다. 폴란드에서 레이건은 존 폴 2세(John Paul II) 교황과 함께 공산주의 정권을 불안정하게 하는 비-치명적 정책을 조정했다. 1979년 교황의 조국 폴란드의 방문은 솔리대러티 운동에 불을 붙이는 걸 도왔다. 1982년 교황청에서 처음으로 교황을 만났을 때 레이건은 종교가 소련인들의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라는 자기의 견해를 밝혔다.

레이건처럼 존 폴 교황은 1981년 암살의 기도에서 살아남았으며 그와 레이건은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자기들을 살려주었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레이건은 11월 18일 자기가 병원에서 브레즈네프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를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연설에서 읽었다. 이것은 외교정책에 대한 그의 첫 주요 연설이었다. 그 연설에서 레이건은 유럽에서 중거리 미사일에 대한 소위 제로 옵션(zero option)을 수용했다. 미국의 NATO 동맹국들은 1970년대 바르샤바 조약국들에 전개된 소련의 SS-20 미사일들이 힘의 균형을 뒤엎는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계획은 새 크루즈(Cruise) 미사일과 퍼싱 II(Pershing II) 미사일을 전개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소련인들은 보다 정확한 미국의 미사일들이 다른 방향으로 균형을 깨뜨린다고 보았다. 레이건의 제안은 만일 소련이 서유럽을 노리는 SS-20미사일들을 철수한다면 미국이 크루즈와 퍼싱 미사일들을 취소할 것이다. 그러나 제로 옵션은 무에 대해 유를 요구하는 것이었기에 어떤 진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는 독자적인 핵 병기고들을 설명하는 계획이 아니었다. 군비축소에 대한 레이건의 염원은 진지했다. 그것은 레이건이 1982년 여름에 그의 첫 유럽여행을 준비할 때 다시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략무기제한 조약인 SALT의 틀을 버리고 전략무기축소인 START를 선호했다. 그는 세계가 이미 3만개의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증가율을 단지 억제하는 대신에 그는 그것들의 절대적 수를 축소하길 원했다.

레이건은 군사적 우월성이 군축의 전제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는 군축이 군사적 우월성을 뒤따르길 원했다. 그러나 서방에서 굉장한 반핵무기 운동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이건의 입장을 군축에 대한 단순한 반대로 간주했다. 1981년 런던과 다른 유럽의 도시들에서 미국의 핵무기 증강에 항의하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제네바에서 회담이 교착되자 이제 대통령은 유럽의 동맹국들이 유럽에 전개할 계획인 미국의 미사일을 거부할 위험에 직면했다.

1982년까지 미국에서 핵동결을 지지하는 대규모 데모들이 있었으며 이것은 1982년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 70만명의 집결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해 가을 그 운동은 에드워드 케네디와 마크 하트필드 상원의원 등이 의회에 동결결의안을 제출할 의도를 천명함으로써 힘을 모았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일방적인 군축의 요구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있었던 유화정책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그런 아이디어는 아주 위험스러운 사기였다. 그는 세계평화협회(the World Peace Council)라는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집단을 인용하면서 소련이 동결운동을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대안으로 제안할 어떤 것이 필요했다. (계속)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