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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셀은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다. 그 자체로는 의미 없는 작은 점에 불과하지만, 무수히 많은 픽셀이 모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를 본다. 2025 대학로 연극/뮤지컬 페스티벌 'pixel, 조각난 세계의 연결'은 이 단순한 진리를 연극적 은유로 바꾸어 제시한다. 개인이라는 작은 조각이 모여 사회를 이루듯, 파편화된 세계의 조각들을 무대 위에서 다시 연결해보자는 기획이다. 오는 16일부터 21일까지 대학로 일대에서 펼쳐지는 이 페스티벌은 기획단체 '몽상가들'을 중심으로 '5678!', '창작19다', '창작집단 H8E', '문화예술 룰루랄라' 네 개 극단이 참여해 각자의 방식으로 '연결'을 이야기한다. 디지털 이미지의 해상도를 비유 삼아 480p에서 2160p까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을 잇는 무대는 관객들에게 서로 다른 픽셀이 모여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를 경험하게 한다.
페스티벌의 주제는 명확하다. 480p는 흐릿한 화면처럼 불안정했던 시대의 연결을, 720p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을, 1080p는 각자도생의 현실과 공동체의 단절을, 2160p는 초연결 사회의 역설과 새로운 가능성을 상징한다. 해상도의 층위가 곧 인간의 시대적 경험을 비유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셈이다. '몽상가들'은 이번 시도를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을 하나의 축 위에 배치하고, 각 시대가 갈망했던 혹은 상실했던 연결의 순간들을 무대 위에서 교차시키려 한다.
첫 무대는 '5678!'의 뮤지컬 'Bastards!'다. 16일과 17일 공연되는 이 작품은 480p라는 가장 낮은 해상도에 대응한다. 수배자 네 명이 보물 상자의 열쇠를 훔치기 위해 모험에 나서는 과정은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다. 불신과 배신, 위장과 도망으로 점철된 인물들의 발걸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해 옮겨간다. 극단은 이 서사를 통해 디지털 이전의 시대, 흐릿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이 진심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중세 귀족 살해 사건을 둘러싼 수배자들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잃어버린 신뢰와 진심의 가치를 되묻는다. 국찬민 연출·극작을 비롯해 김승재, 박미나, 박채영 등 배우진이 참여하고, 박한경의 작곡과 강민찬의 음향, 박시언의 조명이 극의 밀도를 더한다.
뒤이어 18일과 19일 무대에 오르는 '창작19다'의 연극 '멜랑콜리 인 서울'은 720p, 다시 살아나는 과거의 해상도다. 198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꽃을 들고 사라진 묘지를 찾아 헤매는 여정은 단순한 개인의 방황이 아니다. 그가 만나는 노숙자, 다방 종업원, 화가, 자칭 안내자 같은 기묘한 인물들은 모두 "서울이 곧 묘지"라고 말한다. 군사정권기의 억압과 국가가 묻어버린 기억, 그 위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무기력한 생존이 레트로 블랙코미디의 형식으로 무대 위에 펼쳐진다. 이 작품은 웃음을 자아내는 순간에도 씁쓸함을 남기며, 그 시절을 살아낸 이들의 흔적이 여전히 현재를 규정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연출과 극작을 맡은 강현욱은 "그 시절을 온몸으로 살아낸 이들과 지금도 여전히 그 흔적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함께 기억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배우 이영일, 임혜선, 한류하, 김동욱 등이 무대에 올라, 관객으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따라 지금의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한다.
 | 04 | 0 | 공연 'A와 B 사이에 C'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연습 현장 / 사진 몽상가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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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kaoTalk_20250913_160723730_02 | 0 | 공연 '조금 이상한, 조금 낯선' 무대를 준비하는 연습 현장 / 사진 몽상가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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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선보이는 '창작집단 H8E'의 연극 'A와 B 사이에 C'는 1080p에 해당한다. 오늘날 각자도생의 사회 속에서 단절된 개인들이 다시금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타인의 죽음을 목격한 네 인물이 반복된 장면을 재연하며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를 되묻는 과정은, 사실상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하다. 말보다 먼저 움직이는 몸, 이어폰에서 반복되는 음악, 무대 위에 그어진 사각의 선은 각 인물이 멈춰 선 자리와 그들의 죄책, 불면, 상실을 상징한다. 서로의 삶이 교차하며 충돌하고 때로는 침묵 속에 스며드는 순간, 무대는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임주영 연출·극작으로, 박예음, 이한울, 이희도, 최지록 등이 출연해, 관객을 공감과 참여의 자리로 이끈다.
페스티벌의 대미는 21일 '문화예술 룰루랄라'의 연극 '조금 이상한, 조금 낯선'이 장식한다. 2160p, UHD 해상도에 대응하는 이 작품은 초연결 사회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2070년, AI 라디오와 함께 고립된 방 안에서 살아가는 소녀 해일리의 이야기는 디지털 정보의 홍수와 알고리즘 필터 속에서 인간이 겪는 단절을 드러낸다.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진실된 연결은 흐려지는 시대, 마지막 식량마저 떨어진 해일리는 진짜를 갈망한다. 연출·극작을 맡은 유가희는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사회의 모순을 무대 위에 드러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배우 김지원과 강한나가 참여해, 초연결 사회의 역설과 인간적 갈망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이번 페스티벌은 공연뿐 아니라 관객이 직접 참여해 '연결'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도 준비했다. 9월 16일 개막일에는 오프닝 이벤트 '몽상의 조각'이 열려, 관객에게 메시지 카드를 전달하며 첫 시작을 따뜻하게 연다. 티켓 수령이 단순한 절차가 아닌 하나의 기억이 되는 순간이다. 9월 19일에는 '몽상이 있는 날'이 마련돼 관객들이 서로 질문과 답을 주고받고, 색실로 메모지를 이어 붙여 하나의 보드를 완성하는 과정을 통해 주제를 직접 경험하게 한다. 페스티벌 기간 내내 '픽셀을 찾아주세요!'라는 상시 이벤트가 이어지는데, 혜화역 인근 포스터에서 픽셀 조각을 찾아 현장에 가져오면 기념 MD를 받을 수 있다. 마지막 날인 9월 21일에는 '픽셀 Song 리퀘스트'가 준비돼, 관객들이 직접 공연의 감정을 담은 곡을 추천하고 이를 모아 하나의 플레이리스트로 완성한다. 이는 단순히 무대를 보는 것을 넘어, 관객이 공연의 또 다른 픽셀이 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대학로는 한국 공연예술의 심장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OTT 플랫폼과 디지털 콘텐츠가 일상을 점령한 시대, 현장 공연은 여전히 무대 위에서만 가능한 경험으로 관객을 부른다. 이번 페스티벌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픽셀이라는 디지털 언어를 무대 위로 끌어들여,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단절, 미래의 가능성을 한 화면에 담아낸다. 흐릿했던 시대의 갈망부터 초연결 사회의 역설까지, 네 개의 작품은 서로 다른 픽셀이 되어 모이고, 관객은 그 사이에서 자신이 어떤 픽셀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pixel, 조각난 세계의 연결'은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조각난 개인들의 삶이 다시금 하나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과정을 체험하는 무대다. 대학로가 다시 한번 젊은 창작자들의 실험과 관객의 참여가 교차하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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