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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낯선 이들이 건네는 위로와 기억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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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9. 21. 08:00

제주 게스트하우스에서 스쳐 지나가는 삶이 드러내는 고향과 공동체의 얼굴
극단 파수꾼, ‘달빛여행’을 통해 붕괴와 재생의 경계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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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달빛여행'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연습 현장 / 사진 극단 파수꾼
기술이 범람하는 오늘의 시대, 무대 위에선 여전히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이야기가 숨을 쉰다. 극단 파수꾼의 신작 연극 '달빛여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한다. 빠른 속도와 편리함에 익숙해진 일상에서 잠시 멈춰, 잃어버린 감각과 기억, 관계를 더듬어보자는 물음이다. 2025 서울 메세나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무대에 오르는 이번 작품은 제주도의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배경으로, 낯선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을 건넨다. 이번 공연은 9월 19일 금요일부터 28일 일요일까지 예술공간 혜화에서 관객과 만난다.

극단 파수꾼은 창단 이래 언제나 동시대적 질문을 놓지 않았다. 검열과 블랙리스트를 풍자한 '괴벨스 극장', 고령화 사회의 그림자를 드러낸 '택배 왔어요', 미혼모를 둘러싼 사회 제도의 모순을 드러낸 '베이비 박스', 학교라는 공간에서 세대 갈등을 드러낸 '친절한 에이미 선생님의 하루', 노동과 인간 존엄을 다룬 '7분(Sette Minuti)'까지, 이들의 무대는 늘 사회적 질문과 인간적 따뜻함이 교차하는 현장이었다. 이번 '달빛여행' 또한 그 맥락 위에서 이어진다. "지금, 왜, 우리는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가"라는 단체의 오랜 물음이, 다시 한번 무대를 통해 관객과 만나려는 것이다.

작품의 중심 무대는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 '빙떡 하우스'다. 한 달 살기를 택한 스태프 신비와 손님 하이디는 처음엔 가벼운 여행 이야기를 나누지만, 점차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빵집 창업을 꿈꾸는 하이디, 타로점을 취미 삼는 신비의 일상 속에는 이미 현실의 고민과 희망이 교차한다. 여기에 술을 즐기는 장미, 곤충을 연구하는 애벌레 박사, 고향을 찾아온 재일교포 3세 모모, 그리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황사장이 합류하며 무대는 다층적인 삶의 풍경으로 확장된다. 낯선 만남은 그 자체로는 가볍지만, 이들이 풀어내는 사연은 곧 고향과 가족, 기억과 자연을 소환한다.

이야기의 전환점은 황사장의 형제 같은 존재, 양교수가 등장하면서 마련된다. 그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동생 동현과 함께 과거를 돌아보며, 부모 세대와 고향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따뜻한 대면은 곧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양교수의 파멸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공동체가 던지는 질타와 시선의 무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게스트하우스라는 한시적 공간은 낯선 이들이 모여드는 임시적 거처이지만, 동시에 서로를 위로하고 이해하는 자리로 바뀐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비추게 된다.

작품은 단순히 개인의 삶에 머물지 않는다. 자연과 사회, 기억과 공동체의 층위가 교차하며 '달빛여행'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드러낸다. 애벌레 박사가 들려주는 숲의 이야기는 자연의 소중함을 환기하고, 모모가 나누는 제주도의 기억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여기에 도둑 사건과 소문이 얽히며 게스트하우스는 소란스러워지고, 결국 인물들은 개기월식을 보기 위해 달빛 여행을 떠난다. 우주적 사건을 마주하는 순간, 이들은 빛과 어둠, 소멸과 재생의 경계를 넘나들며 질문한다. 우리는 붕괴 속에서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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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달빛여행'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연습 현장 / 사진 극단 파수꾼
연출을 맡은 이는 극단 파수꾼 대표 이은준이다. 그는 국립극단 연수단원 시절부터 극단 골목길 상임연출을 거쳐 2014년 극단 파수꾼을 창단했다. '속살', '페드라의 사랑', '괴벨스 극장', '율구', '7분',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하얀역병' 등 굵직한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며 동시대 사회를 향한 질문을 끊임없이 이어왔다. 2018년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 2022년 서울연극제 우수상, 2024년 자유경연작 우수상 등 수상 이력은 그의 행보가 단순히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연극적 완성도와 설득력을 확보했음을 보여준다. 이번 '달빛여행'에서도 이은준 특유의 집요하고 호방한 시선이 관객을 사로잡을 것으로 보인다.

배우진 역시 극단의 에너지를 채운다. '리어왕'과 '동물농장'의 구태민, '율구'와 '만주전선'의 권혁, '속살'과 '하얀역병'의 김가빈, '괴벨스 극장'의 박구용, '동백당:빵집의 사람들'과 '열녀를 위한 장례식'의 박소연이 함께한다. 또한 '카르타고'의 유독현, '돌고돌고'의 이경원, '속살'과 '7분'의 이상숙, '현관문을 열어라'의 조은, '덴빈'의 황민수 등 다양한 무대 경험을 지닌 배우들이 합세했다. 이들의 앙상블은 단순히 배역의 기능을 넘어, 각기 다른 삶의 결을 입체적으로 엮어내는 데 힘을 실을 것이다.

극단 파수꾼은 창단 이래 10년 넘게 꾸준히 연극계에 목소리를 내왔다. '괴벨스 극장'으로 한국연극평론가협회의 올해의 연극 BEST3에 올랐고, '율구'로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했으며, 최근 '속살'과 '돌고돌고'로 서울연극제에서 연속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 '달빛여행'은 이러한 연혁 속에서 더욱 무게감을 가진다. 단순히 한 편의 공연을 넘어, 동시대 연극이 어떻게 사회와 인간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공연의 배경이 되는 게스트하우스는 오늘날 도시와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다. 다양한 계층과 사연의 사람들이 잠시 모여드는 공간은, 곧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이 스치고 부딪히는 현장이 된다. 그 속에서 도둑 사건과 소문의 소용돌이는 불안을 드러내지만, 개기월식을 함께 바라보는 순간은 오히려 그 불안을 넘어서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관객은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파편 속에서도 여전히 공감과 위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결국 '달빛여행'은 질문한다. 절망과 소멸 앞에서도 인간은 어떻게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는가. 타인의 고통을 마주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위로와 공존을 선택할 수 있는가. 극단 파수꾼이 지금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술이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에도, 무대 위 아날로그적 서사는 여전히 유효하다. 관객에게 젖어드는 이야기, 애잔하지만 결코 희망을 놓지 않는 시선은 이번에도 극단의 서명을 새기듯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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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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