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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기자의 스포츠 비즈니스] 제주SK-R&G 파트너십, 한국 축구 산업의 새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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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9. 20. 09:04

섬 구단의 한계를 글로벌 허브 전략으로 전환… 유소년 육성과 가치 사슬 재편의 실험
벤피카·아약스·리옹 사례와 맞닿은 산업 모델… 한국 프로축구 구조 전환 가능성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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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헨 자우어 R&G 대표와 구자철 제주SK 유스어드바이저가 협약 체결 직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제주SK가 섬 구단이라는 지리적 제약을 산업 전략으로 바꾸려는 시도에 착수했다. 바이에른 뮌헨과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클럽 LAFC가 합작해 설립한 조인트 벤처 R&G(Red & Gold Football)와의 파트너십 체결은 단순한 교류 협약이 아니다. 유소년 육성, 스카우팅, 데이터 트레이닝, 경로 설계까지 구단의 가치 사슬을 재편하는 실험이다. 한국 프로축구에서 해외 구단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구조적 전환을 모색하는 대표적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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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창용 제주SK 대표이사가 파트너십의 방향성을 밝히고 있다. / 사진 제주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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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철 제주SK 유스어드바이저가 기자회견에서 협약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 사진 제주SK
◇ 구조적 성장과 지속 가능한 경로 설계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자리한 인물은 구창용 제주SK 대표이사, 구자철 제주SK 유스 어드바이저, R&G의 대표 요헨 자우어 세 사람이었다. 이들이 내놓은 메시지는 공통적이었다. 눈앞의 성적이 아니라 구조적 성장, 단기 흥행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파이프라인, 국내 경쟁을 넘어 세계로 이어지는 경로 설계. 이 세 가지 축은 이번 협약의 목적이자 한국 프로축구가 풀어야 할 장기 과제였다.

구창용 대표는 모두 발언에서 유소년 문제를 직설적으로 제기했다. "제주는 지리적 제약, 학제에 묶인 연령 체계, 수도권과의 경쟁 열세 등 현실적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이번 파트너십은 단순 생존이 아니라 전환입니다. 해외에서 검증된 체계를 성장 동력으로 들여오는 선택입니다." 그는 장기 프로젝트임을 강조하며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말로 결론을 맺었다.

자우어는 R&G의 성격을 설명했다. "레드 앤 골드는 바이에른 뮌헨과 LAFC가 2023년에 만든 조인트 벤처입니다. 핵심은 전 세계 유소년 발굴과 육성, 그리고 단계별 경로 설계입니다. 남미 우루과이, 아프리카의 감비아·세네갈·카메룬에서 프로젝트를 운영해 왔고, 아시아 확장은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습니다." 그는 한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허브로 지목하며, 기술과 신체, 성실함, 학습 태도 등에서 한국 선수의 강점을 언급했다. 다만 성장 곡선이 꺾이는 시기에 체계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구자철은 이번 협약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제주에서 발탁돼 프로 무대에 입문했고, 그 활약을 눈여겨본 자우어의 주목 속에 독일 무대로 향했다. 그는 다시 행정가이자 가교로 돌아와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제 축구 인생의 출발점은 제주였고, 그 경험이 독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자우어 대표와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그는 협약의 본질을 "한국 유소년에게 세계 무대의 경험을 정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구자철은 실무자로서의 역할도 분명히 했다. "당장은 스카우팅에 무게를 둡니다. 세계급 잠재력을 가진 선수를 찾아 훈련 환경과 데이터를 세계 기준으로 맞물리게 하겠습니다. 독일어와 영어, 행정 절차를 직접 처리해 시간을 줄이겠습니다." 그의 말은 유럽과의 협의 과정에서 행정 지연을 줄이고 선수 성장 곡선을 지켜내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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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 종료 뒤인 2024년 12월, 제주 유소년 시스템 강화를 위해 열린 U-18 학부모 간담회. 현장의 신뢰 구축이 이번 프로젝트의 토대가 됐다. / 사진 제주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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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 글로벌 네트워크에 새로 합류한 제주SK의 위치. 세계 축구 생태계 속 산업적 접속을 의미한다. / 사진 R&G 홈페이지 갈무리
◇ 글로벌 파트너십과 산업적 의미

이번 파트너십의 목표는 세 층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유망주의 해외 경험을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루틴으로 만드는 것이다. 둘째, 지도자와 시스템의 역량 강화다. 구창용 대표는 "훈련법, 평가, 데이터 운용, 회복 관리 같은 내재된 노하우를 지도자들이 직접 배우고 현장에 이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셋째, 글로벌 네트워크 안에서의 양방향 인재 흐름이다. 제주 유스가 해외로 나가는 것만큼, 남미·아프리카 유망주가 제주를 거쳐 아시아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가 꺼내든 이 실험은 이미 세계 여러 클럽이 선택해 온 전략과 맞닿아 있다. 포르투갈 벤피카는 유럽에서 일관된 유소년 기반 수익 모델로 알려져 있다. 국제스포츠연구센터(CIES)의 연구에 따르면, 벤피카는 지난 10년간 자체 육성 선수 이적료로 5억 1,600만 유로(약 7,500억 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는 유럽 전체에서 가장 높은 수치다. 이처럼 핵심은 조기 출전의 일상화, 판매 수익의 아카데미 재투자, 그리고 스카우팅과 의학·데이터의 통합 운영이다.

특히 주앙 펠릭스, 후벵 디아스, 곤살루 하무스 같은 핵심 선수의 대형 이적이 집중된 최근 5년간 전체 수익의 3분의 2 이상이 발생했다. 벤피카는 하위 연령부터 1군에 이르는 단계별 루틴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선수 판매로 확보한 막대한 자금을 다시 성장 인프라에 투입해 선순환을 만든다. 외부 이적이 발생하면 기존 클럽으로의 보상 제도도 작동해 성장 단계에 기여한 조직으로 가치가 환류된다. 이 방식은 경기력과 재정 두 축을 함께 키우는 구조로 평가된다.

네덜란드 아약스는 유스팀과 1군이 동일한 전술 언어를 쓰는 점이 특징이다. 암스테르담 데 투콤스트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포지션별 역할과 원리 기반 훈련을 표준화하고, 성숙도에 도달하면 연령 구분과 관계없이 상위 그룹 훈련과 실전에 투입한다. 이 통일성은 상향 이동 때의 적응 비용을 낮추며, 유소년이 상위 레벨의 요구를 조기에 체득하게 만든다. 클럽은 이 과정을 데이터와 영상 분석으로 뒷받침하고, 다음 단계 목표를 훈련 설계에 반영한다.

프랑스 올랭피크 리옹은 17세에서 19세 구간의 전환 관리로 유명하다. CIES가 발표한 '유럽 5대 리그 아카데미' 평가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리옹은 B팀과 U19, 1군 훈련을 촘촘히 순환시켜 경기 속도와 강도에 익숙해지게 하고, 성장률을 지표화해 분기별 과제를 조정한다. 특히 2019/20 시즌에는 1군 스쿼드 27명 중 12명, 즉 44%가 리옹 아카데미 출신일 만큼 유소년 선수의 프로 진입률이 높게 유지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기 결과에 종속되지 않는 출전 루틴과 피지컬·기술·인지 훈련의 균형이 결합하면서 프로 진입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

다국적 네트워크 관점에서는 시티풋볼그룹과 레드불 그룹이 대표적이다. 전자는 영국, 미국, 일본, 호주 등 다수 리그에서 통일된 훈련 기준과 분석 체계를 공유한다. 선수는 출전이 보장되는 환경으로 단계 이동하며, 코칭과 데이터의 언어가 공통이므로 적응 비용이 낮다. 후자는 잘츠부르크와 라이프치히를 축으로 한 상향 이동 경로가 명확하다. 높은 압박, 전환 속도, 공간 관리 같은 전술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해 성장 곡선을 가속하는 것이 특징이다. 두 모델 모두 단순 임대를 반복하는 방식과 달리 경로 설계와 지식 공유가 중심에 있다.

일본은 리그와 협회의 제도 설계가 강점이다. 전국 단위 지역 트레이닝 센터와 JFA 아카데미 프로그램은 학교와 클럽, 연맹의 연결을 강화해 성장기에 실제 경기 시간을 끊김 없이 제공한다. 하위 리그와 컵 대회에서 젊은 선수의 출전 시간을 유도하는 장치가 운영되면서 이행 비용이 낮아졌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대학, 프로로 이어지는 사다리가 매끈해졌다. 이 구조가 유소년의 지속적 공급 기반을 만들었다는 분석이 많다.

미국 MLS는 리그 차원에서 경로를 새로 설계했다. MLS 넥스트와 MLS 넥스트 프로가 아카데미에서 1군으로의 점프를 완충하고, 홈그로운 제도와 젊은 해외 자원 영입을 장려하는 장치가 결합됐다. 이 체계는 출전 기회를 증가시키고, 선수 판매와 재투자를 병행하는 비즈니스 루프의 토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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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벤피카 유스 아카데미 전경. 수익과 재투자를 결합한 선순환 모델의 대표적 사례다. / 사진 벤피카 홈페이지 갈무리
◇ 제주의 전략과 리스크 관리

규범과 인센티브도 결정적이다. 국제 이적에서는 연대기여금과 트레이닝 보상 제도가 작동하며, 성장기에 지도한 클럽으로 일정 보상이 돌아간다. 제도 운영 방식은 국가마다 차이가 있으나, 유소년 투자가 장기적으로 유지되는 배경에는 이러한 규칙이 있다. 클럽은 이 구조를 이해하고 회계와 재투자 과정에 반영해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얻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제주가 선택한 파트너십은 세 갈래에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출전과 경험의 루틴화다. 이벤트성 연수가 아니라 연령과 레벨에 맞춘 정기 교류를 설계하고, 훈련과 경기의 질을 데이터로 관리해야 한다. 이는 아약스, 벤피카, 리옹의 공통 원리다. 둘째, 지도자와 시스템의 내재화다. 외형적 시설보다 훈련법, 평가, 회복, 분석의 표준을 현장 루틴으로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 셋째, 경로의 다변화다. 한 단계에서 차질이 발생하면 즉시 다른 경로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하며, 다국적 네트워크와의 협업은 이 옵션을 넓힌다.

스카우팅 경쟁의 무게 중심을 바꾸는 일도 병행돼야 한다. 수도권 선호가 견고한 상황에서 제주가 제시할 차별성은 상위 레벨로 이어지는 경로의 설득력이다. 벤피카처럼 판매 수익을 다시 성장 인프라에 투입하는 재투자 루프를 명확히 하고, 국제 이적 보상 제도 이해를 높여 회수 가능성을 제고해야 한다. 이 메시지가 자리잡으면 유망주의 선택지가 넓어지고, 1군의 연령 구조와 역동성도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

리스크는 숨기지 않는 편이 낫다. 유소년 프로젝트 성과는 통상 3년에서 5년 단위로 확인된다. 지도자 교체와 학사 일정, 군 문제, 부상 변수는 경로 설계를 흔들 수 있다. 해외 리그의 외국인 선수 규정과 비자 정책 변화도 상수는 아니다. 다만 경로를 한 가지로 고정하지 않는 설계는 충격을 흡수한다. 파트너십이 남미와 아프리카, 유럽에 동시 접점을 가진 플랫폼을 통해 진행된다는 점은 이 탄력성의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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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철 제주SK 유스어드바이저, 구창용 제주SK 대표이사, 요헨 자우어 R&G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각각 LAFC, 제주SK, 바이에른 뮌헨의 유니폼을 들고 협약 체결을 알리고 있다. / 사진 제주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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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구자철 제주SK 유스어드바이저, 요헨 자우어 R&G 대표, 구창용 제주SK 대표이사, 최정석 제주SK 경영지원실장이 독일 현지에서 협약 기념 유니폼을 들고 있다. / 사진 제주SK
◇ 산업적 이정표로서의 제주 협약

이제 측정의 문제다. 17세에서 20세 구간의 1군 출전 시간과 다음 시즌 전환율, 지도자 교육의 현장 반영 정도, 수도권 외 지역 재능의 유입 변화, 유스 관련 상업 수익의 신규 라인이 관찰지표가 된다. 데이터 리포트의 정밀도, 부상 복귀 속도, 상위 단계 훈련 참여 빈도 같은 미시 지표도 유의미하다. 수치가 누적되면 설계의 옳고 그름이 드러난다.

요약하면 이번 협약은 국내 사례를 세계적 원리에 맞춰 구현하려는 시도다. 벤피카의 재투자 루프, 아약스의 전술 일관성, 리옹의 전환기 관리, 일본의 제도 설계, 다국적 그룹의 경로 운영은 서로 다른 문맥을 갖지만 공통의 핵심을 공유한다. 성장기에 실제 경기와 훈련의 질을 끊김 없이 공급하고, 그 과정을 데이터로 관리하며, 발생하는 수익을 다시 성장 기반으로 돌려놓는 구조다. 제주가 이 원리를 학제와 지역 여건에 맞게 번역한다면 파트너십은 단순한 교류를 넘어 산업적 전환 장치가 될 수 있다.

특히 이번 선택은 한국 프로축구가 수년간 지적받아온 성장 공백, 글로벌 접속 지연, 투자와 수익의 단절을 정면으로 겨냥한 실험이다. 섬 구단이라는 제약 속에서 세계 최상위 클럽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가치 사슬 전반을 재편하려는 시도는 한국 축구 산업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바이에른 뮌헨과 LAFC라는 양 축을 잇는 R&G 플랫폼에 제주가 직결된 순간, 국내 리그는 단순 소비 시장을 넘어 공급과 성장의 허브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제주가 맺은 이번 협약은 지역 구단의 생존 전략을 넘어, 한국 축구 산업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 무대와 접속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산업적 이정표라 할 만하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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