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인들과 러시아인들은 오랜 경험으로부터 전쟁이란 단지 적의 무조건 항복을 가져오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쟁이란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군사적 승리란 정치적 과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이런 목적에 맞게 형성되어야 한다.
미국의 군사적 지도자들은 전투장과 그 후에도 그들의 조망에서 이런 어려움을 인식했다. 1945년 4월 영국인들은 패튼 장군의 군대가 가능한 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많은 지역을 해방시키길 원했다. 그들은 정치적 이득을 위해 특히 수도 프라하(Prague)의 점령을 원했다. 미국의 마샬 장군은 "개인적으로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인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코멘트와 함께 영국의 제안을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전달했다.
마샬은 이 점에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합동참모들로부터 구체적인 명령을 받지 않는 한 단지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 군사적으로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어떤 조치도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기 때문이다. 처칠 영국 수상과 영국의 합참으로부터 거듭되고 긴급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는 거기에서 멈추었다. 비슷한 결정들이 다른 경우에서도 이루어졌다. 미국의 브래들리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미국인들이 러시아인들에 앞서 베를린을 장악해야 한다는 영국인들의 주장에 관해서 이렇게 말해야 했다고 한다. "군인으로서 우리들은 정치적 통찰과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전쟁을 복잡하게 하는 영국인들의 경향을 순진하게 내다보았다."
이렇게 정치적 고려를 소홀히 하고 군사적 목표에만 집중하는 것에는 하나의 미덕이 있다. 그것은 전쟁을 신속하게, 값싸게, 그리고 철저하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승리들은 단기적일 수 있지만 그러나 후에 엄청난 정치적 및 군사적 대가를 지불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군사적 승리의 정치적 결과에 대한 고려 없이 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그 승리가 타결하려고 했던 것들보다도 심각하고, 아니, 더 나쁜 정치적 문제들을 창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승리는 적어도 정치적 문제들을 깨닫고 적어도 평화적인 수단으로 타결하려고 노력하는 지위에 놓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 의한 서두른 무조건 항복의 추구는 전후 고통스러운 냉전체제를 낳고 말았다.
냉전의 원인과 책임에 대해서는 미소 간에 서로 원인과 책임을 전가하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정통파와 수정주의파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들의 수많은 저작들 중에서 1967년에 출간된 루이스 홀스(Louis J, Halles)의 '역사로서 냉전(The Cold War as History)'이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가 인용하길 좋아하는 소위 최초이면서 어쩌면 마지막 "과학적"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를 상기시키는 그의 설명은, 인류가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음에 빠진다는 인식에 입각한 우울한 지혜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스탈린은 경직된 신학의 지지자가 아니라 러시아의 영향권이라는 전통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완고한 현실주의자로 보인다. 그리고 전후 세계질서에 대한 스탈린의 바로 이 영향권의 개념이 얄타회담에 대한 그의 보고서에서 가장 뚜렷하게 표현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철학과 정면 충돌했다.
전후세계에 대한 이 두 개념의 양립불가능성이 동유럽 국가들에서 수립될 정부의 성격에 대한 논란에서 정점에 올랐다. 1945년 새로운 폴란드 정부가 수립되는 조건에 대해 미국과 소련 사이에 다툼이 발생했다. 스탈린은 소련에 '우호적인'정부를 고집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그것들이 소련에 우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이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스탈린은 그런 입장의 내적 모순을 분명히 보았다. 스탈린은 동유럽의 어느 국가에서나 자유롭게 선출된 정부는 반소일 것이며 그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서방 측의 입장을 러시아의 이익에 대한 확고한 적대감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서방세계는 동유럽국가들이 소련의 위성국가들로 무자비하게 변환하는 데에서 소련 공산주의의 무한한 야심의 경험적 증거를 보았다. 그리하여 냉전은 거기서부터 계속된 것이다. 문제는 더 이상 '영향권'의 폐지나 유지가 아니라 어느 쪽의 영향권이 얼마나 멀리 확장되느냐가 되어버렸다. 이때 유럽이 두 개의 군사적 진영으로 굳어지면서 두 개의 영향권으로 확고하게 분할되었을 때 냉전은 독일을 분할하는 1945년의 군사적 경계선이 두 영향권 사이에서 항구적인 분계선이 될 것이냐 아니면 그 분계선이 동쪽이나 서쪽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지의 여부에 관한 구체적인 정치적 쟁점에 집중되었다.
독일에 관한 끝없이 계속되는 협상이 있었다. 가장 상징적인 행동은 독일 문제에 대한 서방 측과 소련 측 간의 협상의 난파였다. 그것은 마침내 1947년에 일어났다. 처음으로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인정이 있었다. 그러자 우선 서독을 영국과 미국의 점령지대에 합류시키고 여기에 프랑스 점령지대를 추가함으로써 서독을 재건하려는 서방 측의 결정이 있었다. 1947년 이 순간부터 적어도 일시적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최종적으로 새 서독 국가가 수립될 것이 분명해졌다. 독일은 즉시 분단의 상징이요 기원이며 원인이며 분단의 현실 그 자체였다. 소련이 독일의 일부를 자신을 위해 소유함으로써 명백해진 결과는 유럽이 두 영역으로 분단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나는 소련식으로 통치되고 다른 하나는 소위 민주적으로 통치되었다.
마셜플랜(the Marshall Plan)은 유럽에서 관찰된 상황, 즉 동유럽의 소비에트화라는 비참함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것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군사적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댐을 세우려는 결심을 표현했다. 그것은 서유럽 국가들이 소련의 선전에 저항할 수 있고 특히 프랑스에서 공산당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에 근거했다. 필요한 조건은 유럽의 경제적 재건이었다. 서유럽을 재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독일이 여기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했다. 독일이 공동의 유럽과 대서양 국제기구(NATO)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한 것은 마셜플랜을 통해서였다.
마셜플랜은 동시에 소련인들에게도 제안되었으며 그것의 수락여부는 전적으로 스탈린에게 달려있었다. 이때 체코정부가 소련이 차단하기 이전에 그것을 수락했다. 마셜플랜을 마련한 사람들은 소련의 참여에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다.
소련의 불참이 확실시되었지만 만일 소련이 수락한다면 미국의 상원이 그것을 승인할지 알 수 없었다. 최종적인 분석에서 소련의 전문가들은 스탈린의 거부에 놀라지 않았다. 그에게 제안된 수많은 달러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수락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유럽인들은 미국이 제공하는 펀드의 재분배를 그들 사이에서 재분배할 계획이었다. 이제 소련과 동유럽국가들이 참여하는 그런 유럽위원회는 스탈린에게 수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방 측과 소련은 서로 경합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경합에서 소련은 두 가지의 이점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소련이 자기의 영향권이라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지역을 소련의 붉은 군대가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유럽의 공산당들이 소련정부가 자국의 정책을 지지하게 하는 조종하에 있었다. 서방세계는 얄타회담 합의의 위반에 대한 법적이고 도덕적인 불평과 독일 통일, 해방과 역행(rollback)의 수사학 외에는 소련의 영향권에 반대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유럽의 분할은 얄타회담이나 협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승리한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소련영향권의 확장에 대항하여 직접 군사적으로 대응하기를 원치 않았던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의 시행과 마샬 플랜 그리고 소련의 봉쇄전략으로 맞섰다.
냉전은 한국에서 열전의 충격으로 그 성격을 급격하게 바꾸어 버렸다. 소련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북한의 침략으로 벌어진 열전은 서방세계에 의해서 소련의 세계정복(영구혁명)을 위한 군사작전의 시발 총성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냉전의 시작 이래 스탈린의 외교정책이 차르의 제국주의를 계승하는 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레닌과 트로츠키의 범세계적인 볼셰비키 혁명을 계승하고 있다는 서방세계의 가정에 대한 결정적 입증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전쟁은 재래식 및 핵무기 군비경쟁의 형식으로 냉전의 극적인 국제적 무장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1990년대 소련공산제국의 몰락으로 구냉전체제는 유럽에서 종식되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그것이 종식되기는커녕 냉전체제의 주역이 소련에서 공산중국으로 바뀌었을 뿐 구냉전체제는 신냉전체제로 접어들었다. 21세기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은 프러시아의 전략가 클라우제비츠를 찬양했던 마오쩌둥과는 달리 중국의 수단을 넘는 중국몽이라는 허황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구(舊)소련의 팍스 소비에트카(Pax Sovietica)가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면 신냉전은 중국의 태생적 '미들킹덤 신드럼(the Middle Kingdom Syndrome)'이라는 고질적 질병에 기인하고 있다. 그것은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시진핑이 꿈꾸는 중국몽은 과거 대동아공영권을 추구했던 일본제국보다도 더 야심적인 세계적 우위의 중국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의 위협은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미국 지정학의 아버지 니콜라스 스파이크먼(Nicholas Spykman)이 경고했었다: "전후 가장 큰 어려움은 일본이 아니라 바로 중국일 것이다. … 4억 인구의 현대적이고 역동적이며 군사력을 갖춘 중국은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중해 내 서방국가들에게도 위협이 될 것이다. 중국은 이 바다의 상당부분을 지배하는 대륙국가가 될 것이고 이것은 마치 지중해에서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와 유사한 것이다."
이런 지정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과 중국 사이의 신냉전체제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국제정치적 현상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한반도를 포함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신냉전체제는 구냉전체제보다 더 지속적으로 위협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냉전이 막 시작하던 1948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거대한 분열(Le Grand Schisme)'에서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평화는 불가능하지만 전쟁은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는 아마도 신(新)냉전체제를 "전쟁 같은 평화(warlike peace)"라고 불렀을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