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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의 안보정론] 유엔, 속절없이 붕괴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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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9. 30. 17:35

김태우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트럼프발 충격과 공포'가 이어지고 있다. 단번에 세계무역기구(WTO)를 내동댕이친 보호주의 무역정책, 비자 수수료 100배 인상, 타이레놀의 자폐증 유발설 등 그가 쏟아내는 정책과 언행 하나하나가 세상을 뒤흔드는 폭탄이 되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되살리기와 안전한 미국 만들기(Restoring America, Securing America) 개혁'을 위한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9월 23일 유엔총회 연설에서도 폭탄들을 쏟아냈다. 러시아 석유를 구매하는 나토(NATO) 국가들을 거칠게 훈육(?)했고, 기후 대응 운동을 '녹색 사기극'으로 질타했으며, "내가 지난 7개월간 일곱 개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동안 유엔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라며 유엔의 무능을 개탄했다.

어느 나라에서든 최고 권력자들의 언행은 세월이 지난 후에야 정확한 평가가 가능하지만, 유엔 무용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가시화되어 온 현상이어서 그의 경고를 단순한 말폭탄으로 넘길 일만은 아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3차 대전의 서막'이 될 수도 있는 충돌들이 일어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유엔은 신뢰할 만한 평화기구로 작동하고 있는가? 한 번쯤 하던 일을 멈추고 물어봐야 할 질문이다.

193개 회원국을 거느리는 최대 국제기구인 유엔은 평화·안전·인권이 위협받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협상, 중재, 제재, 군사행동 등을 통해 갈등을 진화해 왔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16개국의 파병을 끌어내 대한민국을 지켜준 것도 유엔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슬람 과격단체의 테러, 동유럽의 인종청소, 신생 독립국들의 내전 등을 거치면서 유엔의 권능은 시험대에 올랐고, 시진핑 이후 중국의 군사적 굴기와 함께 신냉전 대결 구도가 뿌리를 내리면서 유엔은 급속도로 붕괴하고 있다.

유엔 붕괴의 핵심은 유엔 기구 중 유일하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안보리의 무력화이며, 이런 증상은 핵문제를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안보리는 2006~2017년 동안 11개의 대북제제 결의를 채택하여 북한의 핵·미사일 활동을 견제했지만, 2017년 12월 22일 2397호 이후 중·러는 모든 대북제재 결의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2024년에는 러시아가 '유엔 대북제재위원회'의 '전문가 패널'의 임기 연장 결의안마저 거부함으로써, 북핵 활동을 감시하는 기능도 해체되었다.

지금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핵사용을 위협하고 중국은 핵군비통제 협상을 외면하고 핵무력 고도화에 진력하고 있으며, 북한과 이란의 핵문제도 좀처럼 잠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세계 핵 거버넌스가 붕괴하고 있다. 이제 북한이 전술핵을 배치하고 대륙간탄도탄과 핵어뢰를 시험해도 이를 제지할 안보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안보리의 무력증은 핵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안보리가 즉각적인 철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상정하자, 러시아는 '셀프 거부권'을 행사했고 중국·인도·UAE 3국은 기권했다. 9월에는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루간스크 인민공화국(LPR), 자포리자, 헤라손 등 점령지 네 곳의 러시아 합병을 규탄하는 안보리 결의안도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와 중국·인도·브라질 등의 기권으로 부결되었다.

지금 유럽에서는 러시아와 나토 간의 전면전 위험이 커지고 있고 가자지구, 바브엘만데브 해협, 호르무즈 해협, 대만해협 등에서 불길이 꺼졌다가 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으며, 전 세계는 새로운 군비경쟁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그럼에도 거대한 조직으로 거느리고 엄청난 돈을 쓰는 유엔은 트럼프 대통령의 지적대로 '방관하거나 공허한 말'만 내놓고 있을 뿐이다. 안보리가 '우리 편의 말은 틀려도 맞고 저쪽 편의 말은 맞아도 틀리는 당파 싸움터'로 전락하면서 빚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런 가운데 매년 유엔총회에서 특정 상임이사국들의 거부권 횡포를 막는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비등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전문가들은 중·러의 거부권 남용을 해소·완화하는 방법으로 상임이사국 숫자를 확대하여 거부권 오남용 효과를 희석하는 방법, 유엔헌장 개정을 통해 중·러의 상임이사국 자격을 취소하는 방법, 상임이사국의 책임 불이행을 이유로 상임이사국 지위를 박탈하는 방법 등을 논의하고 있지만, 개혁안 자체가 안보리의 결의로 채택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현실성이 있을법해 보이는 방안은 없다. 1920년에 창설된 국제연맹(LN)은 강대국 간의 이해 충돌로 27년 만에 임종을 맞았다.

지금 유엔은 속절없이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그때까지 생존해야 하고 그 이후에도 번영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정파적 이해를 넘어 현재는 물론 먼 미래까지 내다보면서 전략적 선택을 고심하고 국가생존 전략을 수립·구사해 나가는 국가적 역량을 모아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사는 지도자들에게 부여된 신성한 의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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