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술관서 내년 1월까지...1940~90년대 대표작 80여점 선보여
지구촌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면모도 조명...동시대 문인들 증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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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문화공보부가 베트남전 국군 활약상 기록을 위해 파견한 10명의 화가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천경자는 맹호부대에 배속되어 20여일간 전장을 누비며 스케치했다. 군용 막사에서 자고 헬기를 타고 전방을 다니는 험난한 상황에서도 그녀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전쟁기록화를 완성해냈다.
"천경자는 전쟁의 최전선에서 참혹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그답게 우거진 밀림과 이국적인 열대의 식물로 아름다운 전쟁기록화를 그려냈다"고 서울미술관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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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은 천경자가 자신의 삶을 '슬픈 전설'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여기며, 나이와 동일한 페이지 수로 작품명을 지었던 것에서 따왔다. 91세로 세상을 떠난 그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어 새로운 101페이지를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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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천경자가 출판계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섹션이다. 1970년대 '도서장정의 황금기'를 이끈 천경자는 당대 문인들과의 교분을 바탕으로 80여종의 책 표지와 삽화를 그렸다. 현대문학, 문학사상 등 주요 문예지는 물론 박경리, 이봉구 등 당대 작가들의 작품집 표지에 그의 그림이 실렸다.
천경자의 또 다른 면모인 '세계 기행 화가'로서의 모습도 조명된다. 1969년 45세에 시작한 첫 해외여행부터 25년간 13차례에 걸친 세계 여행 경험이 고스란히 화폭에 담겨있다.
타히티에서 시작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거쳐 아프리카 대륙까지 누빈 그의 여정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지구촌 다큐멘터리' 작업이었다.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 그의 기행문과 스케치는 신문 연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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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1998년 천경자가 채색화 57점과 드로잉 39점, 화구 등을 서울시에 기증하며 "나의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일반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고 했던 뜻을 기리는 데 집중했다. 천경자는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저작권과 작품을 환원한 최초의 작가로 평가받는다.
전시장 곳곳에는 천경자와 교류했던 당대 문인들의 글이 배치되어 있다. 소설가 박경리는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수도 없고 멀리 할 수도 없다"며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이다"라고 애정 어린 평가를 남겼다. '명동백작' 이봉구는 천경자를 모델로 한 소설 '앵도'(1956)에서 "지금쯤 촌역 앞에서 꽃을 그리고 있을까"라며 그리움을 표현했다.
전시와 함께 다양한 부대행사가 마련된다. 12월 6~7일 천경자의 삶을 소재로 한 창작 연극 '슬픈 전설의 화가'가 서울미술관에서 공연된다. 11월 중순에는 데일리아트와 함께 '길 위의 미술관' 투어도 진행될 예정이다. 천경자가 거주했던 서촌 일대를 중심으로 그의 삶의 흔적을 따라가는 프로그램이다. 전시는 내년 1월 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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