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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유교를 드높인 한무제, 공화정을 내세운 아우구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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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0. 12. 18:01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56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중국사에서 최초의 제국을 설계한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 기원전 284~208)는 진시황이 서거하자 곧 저잣거리에서 허리가 잘리는 극형 요참(腰斬)을 당했다. 로마사에서 최초로 제국의 기틀을 닦았던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반대자들에게 23회나 칼부림을 당해 쉰여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모두 기존의 질서 대신 제국의 질서를 세우려 했던 정치 혁명가였다. 작용은 반작용을 일으킨다는 물리학의 법칙처럼 정치 혁명에는 구조 반동(structural reaction)이 따라온다. 새로운 질서가 들어설 땐 구체제의 권력자들이 강력하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정치 혁명과 구조 반동

고대 중국의 유생들은 주(周) 왕실의 지휘 아래서 수많은 제후국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봉건(封建)의 질서를 이상화했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귀족들은 기원전 500년경 왕정을 폐기하고 들어선 로마 공화정을 최고의 통치 모델이라 여겼다. 이사는 주대(周代)의 봉건제가 전국 시대의 분열과 혼란을 초래한 낡아빠진 고대의 제도라는 진단 아래 온 천하를 일인이 지배하는 제국의 이념을 중국사 최초로 설파했던 인물이다.
로마 원로원의 귀족 세력은 집정관과 원로원과 민회의 호민관이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갖춰가는 로마 공화정의 전통을 영구히 유지하길 갈망했다. 로마 공화정에서 집정관을 역임한 후 갈리아 남부의 총독으로 임명됐던 카이사르는 기원전 58~51년 갈리아 전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로마의 속주(屬州)로 만들었다. 카이사르의 무공(武功)에 시기와 공포를 느낀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비우고 남하하면서 내전을 개시했으나 참패했다. 패주하여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는 거기서 암살당했다. 카이사르에게 그의 잘린 목을 진상하려는 이집트 파라오의 계략이었다.

폼페이우스 사후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의 칭호를 받고 실질적 황제로 군림했다. 군사력, 정치권력, 종교적 권위까지 독점한 카이사르였지만 그는 스스로 '렉스(rex, 군주)'를 칭하진 않았다. 왕정에 대한 로마인들의 뿌리 깊은 저항심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원로원과 민회를 소집하고, 집정관, 감찰관, 호민관 등 선출직 공직자들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럼에도 권력을 독점한 카이사르가 스스로 황제가 되어 공화정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했던 원로원의 정적들은 그를 무참히 살해했다.

이사와 카이사르는 모두 혁명적 전환기에서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제국의 도래를 앞당겼던 인물들이다. 이사는 진시황을 설득하여 주나라 봉건제를 폐기하고, 군현제를 도입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문자를 획일화하고, 유가 경전을 불사르고 유생을 생매장하는 파격적이고 폭력적인 조치를 강행하도록 했다. 그는 과거의 전통을 부정하고 도래하는 새 시대 통일 제국의 질서를 확립하려 했다.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수백 명 원로원에 집어넣고, 지방관에 대한 직접 지배력을 강화하고, 토지를 분배하고, 부채를 탕감하고, 세제를 개혁하고, 태양력을 채택했으며, 대규모 토목 사업을 벌였다. 아울러 그는 스스로 복속시킨 갈리아 지방 엘리트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적극적 통합 정책을 펼쳤다.

역사의 급변을 앞당겼던 이사와 카이사르의 처참한 죽음은 정치 혁명에 따른 구조 반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들이 비록 자신들이 일으킨 정치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다 알진 못했을지라도 구체제의 종말만큼은 확신했다고 여겨진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그토록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혁명적 개혁안을 밀어붙였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에 서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로마에 서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공공부문
◇공화정을 칭송한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제거됐지만, 종신 독재관으로서 그가 추진했던 제도 개혁은 전통적 로마의 공화정을 이미 무너뜨렸다. 카이사르에 이어 실질적 황제의 권력을 이어받는 자는 옥타비아누스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누이동생이 낳은 딸의 아들이었다. 다시 말해,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의 외종조부(外從祖父)였다.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삼겠다는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서 그는 카이사르의 이름자와 재산과 권력을 계승했다.

그는 10년간 제2차 삼두정치를 이끌며 카이사르를 죽인 반대 세력에 복수했고, 이후 내전에서 승리하여 기원전 31년 최고 권력을 독점했다. 이후 그는 왕정을 연상시키는 모든 칭호를 거부하고 스스로 "제1 시민(Princeps, 프린켑스)"를 자처했다.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 거룩한 자)의 칭호를 부여했다. 독점적 정치권력이 카이사르에서 아우구스투스에게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권력의 세습은 제국의 확립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대체로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 서기 14)로부터 로마제국이 시작됐다고 기술한다.

황위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왜 그토록 황제가 되길 거부했을까?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가는 정치적 과도기의 위험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임페라토르(imperator)'라 불렸는데, 그때까진 황제가 아니라 군사령관을 의미했음에도 공화정의 적으로 몰려 암살당했다. 카이사르의 선례를 의식했던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의 칭호를 거부한 채 스스로 제1 시민이란 겸칭을 갖고서 공화정의 형식을 빌려 황권을 행사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이후 유럽어에서 제1 시민을 의미하는 프린켑스(Princeps)는 군주를 의미하는 'prince'로 말뜻이 바뀌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제국의 제1 황제로 평가되어 온 배경이다.

시안(西安)의 한무제(漢武帝) 동상
중국 시안(西安)의 한무제(漢武帝) 동상. /공공부문
◇유교를 내세운 한무제

아우구스투스에 비견될 만한 중국사의 황제로 한무제(漢武帝, 재위 기원전 141~87)를 꼽을 수 있다. 두 인물 모두 제국의 시스템을 확립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구체제의 정치 이상을 존중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표면상 로마 공화정의 전통을 유지하려 했고, 한무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자행한 진시황과는 정반대로 유교를 국교로 내세웠다.

중앙집권 강화, 군사적 팽창, 영토 확장 등의 위업만 놓고 보면 한무제는 진시황에 이어 제국의 시스템을 확립한 군주였다. 그가 진시황의 법가 사상을 배척하고 진시황이 억압했던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유교 경전에서 칭송하는 고대 성왕(聖王)의 이상적 정치 제도는 진시황의 통일 제국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봉건제였다. 주공(周公)이 세운 서주(西周)의 분봉제는 천팔백국(千八百國)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제후국의 연합체였다. 실제로는 법가 개혁을 강화했음에도 외양상 유교의 덕치를 내세운 한무제의 통치를 흔히 내법외유(內法外儒)라 한다. 유교를 내세우고 법가의 방식으로 통치했다는 말이다.

아우구스투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는 황위에 올라 황권을 휘둘렀던 황제와 다르지 않았지만, 겉으로 로마 공화정의 복원을 내세우며 로마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독재자를 꺼리고 제국을 두려워하는 로마인들을 다스리기 위해선 당연한 조치였다 할 수 있다.

역사적 역할만 놓고 보면, 한무제는 진시황의 후신이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분신이었다. 이 네 인물은 모두 전통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넓은 대륙의 여러 지역을 아우르는 제국적 통합을 완성했다. 진·한 제국과 로마제국이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과 유럽 연합의 모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제국'이란 단어 자체에 정서적 거부감을 품는다. 제국이 최고 존엄에 의한 일인 지배로 인식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황제 없는 제국적 질서는 불가능할까?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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