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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는 7000여 개의 언어가 존재하며, 31개국에 걸쳐 80여 개의 언어박물관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박물관은 1927년에 설립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에스페란토박물관이며, 우리나라에는 2014년에 설립된 국립한글박물관과 2023년에 개관한 세계문자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한자문화권 최초로 백제로부터 한자를 전수받은 일본이 2016년 6월 29일 한자박물관을 교토(京都)에 개관했다.
교토 관광의 정점이라는 기온(祇園) 입구, 2층 규모의 한자박물관은 1층에서 4세기 백제 왕인(王仁) 박사의 한자 전수에서 이어진 한자의 역사를 다양한 유물과 그림 등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2층은 다양한 게임이나 '갑골문자'를 활용한 디지털 프로그램을 통해 한자와 친숙해지면서 배울 수 있는 놀이공간으로 만들어져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또 한자의 경이로움과 심오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계몽 캠페인의 일환으로 1995년에 시작한 '올해의 한자' 코너는 늘 뉴스의 중심에 있다. 매년 연말, 다음 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전국의 한자를 공모하여, 12월 12일 '한자의 날'을 기념, 교토 청수사에서 발표한다. 2025 '올해의 한자'는 '금(金)'. 시대를 반영하는 다양한 해석이 뒤따랐다.
자칫 어렵고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한자라는 콘텐츠와 최첨단 IT가 만나 펼쳐 보이는 프로그램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며 한자 놀이의 세계에 빠지게 만든다. 한자말 물고기를 낚아 올리면 그것이 초밥이 되어 올라오고, 내 몸을 이용해 한자를 만들어보고, 상형문자인 한자의 원리를 애니메이션으로 터득하다 보면 한자공부는 어느새 재미난 놀이가 된다. 또 감탄을 자아내는 건 한자사전 '대한화사전'에 수록된 5만자의 한자로 구성된 '5만자 타워'. 박물관 중앙에 위치한 기둥 형태의 전시물로 일본에서 사용되는 주요 한자 5만 자가 새겨져 있어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단순한 한자 구경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문화와 역사를 체험하고, 한자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키는데, 한자 교육을 조금이라도 받은 사람이라면 전혀 낯설지 않은 곳이다.
1층에는 한중일 공용한자 808자를 알려주는 코너도 있다. 한중일 세 나라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한중일 30인회'가 제정한 '공용한자 808자'는 세 나라의 일상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기본한자들이다. 공용한자 제정의 필요성은 한국에서 처음 제기했으며, 서울에서 500자가 선정됐고, 일본에서 800자로 늘렸다. 그리고 중국에서 29자를 넣고, 덜 쓰이는 21자를 빼면서 808자가 되었다. '문화의 축이 서구에서 아시아로 옮겨지고 있는 이때 한중일 공동 상용한자를 제정함으로써 새로운 아시아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는 언론보도도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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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인에게 한자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공용한자 808자' 교육을 소홀히 하는 곳이 바로 한국이란 사실이 슬프다.
전시장을 지나면서, '우리말 한자'만이라도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 영어, 한자가 뒤섞인 혼란의 극복방법을 찾아야 하고, 우리말과 결합된 한자의 바른 사용법도 가르치고, 일본어투 한자를 잘못 사용하는 사례를 고치기 위해서라도. 어떤 이는 문화재 답사길에서 만난 전각이나 편액의 뜻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자어를 한자로 쓰지 않고 한글로 쓰면 그 의미는 사라지고 소리만 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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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한자박물관을 평가할 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식의 상투적인 치사는 안 된다는 묘한 절박함을 느낀다. 왜 우리는 가질 수 없는가. 양반문화, 선비문화, 유교문화를 고양하는 지역에서, 또는 어느 자랑스러운 문중(門中)에서, 또는 향교, 서원, 서당에서 우리도 '눈 밝은' 한자박물관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된 미래',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이런 열쇳말들이 꿈틀대는 것 같다.
/김정학 (前 대구교육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