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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학의 내가 스며든 박물관] 스펙트럼 넓은 한자문화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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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0. 12. 17:57

<15> 일본 교토 한자박물관
일본 교토 한자박물관
일본 교토 한자박물관.
역사 공부의 가장 큰 덕목은 그것이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옛것을 미루어 새로움을 발견하고, 옛것을 본받아 새로움을 만들어 가는 삶을 생각하면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박물관은 참으로 귀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데 모아서 보여주는 것'에서 '관람객이 경험하는 것'에 더 큰 비중이 실리는 시대가 되면서 박물관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규모의 장대함보다는 콘텐츠를 통한 체험과 감동의 크기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제 박물관 전시의 성공 여부는 역사를 반추하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발휘하느냐에 달려 있다.

세계에는 7000여 개의 언어가 존재하며, 31개국에 걸쳐 80여 개의 언어박물관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박물관은 1927년에 설립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에스페란토박물관이며, 우리나라에는 2014년에 설립된 국립한글박물관과 2023년에 개관한 세계문자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한자문화권 최초로 백제로부터 한자를 전수받은 일본이 2016년 6월 29일 한자박물관을 교토(京都)에 개관했다.

교토 관광의 정점이라는 기온(祇園) 입구, 2층 규모의 한자박물관은 1층에서 4세기 백제 왕인(王仁) 박사의 한자 전수에서 이어진 한자의 역사를 다양한 유물과 그림 등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2층은 다양한 게임이나 '갑골문자'를 활용한 디지털 프로그램을 통해 한자와 친숙해지면서 배울 수 있는 놀이공간으로 만들어져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또 한자의 경이로움과 심오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계몽 캠페인의 일환으로 1995년에 시작한 '올해의 한자' 코너는 늘 뉴스의 중심에 있다. 매년 연말, 다음 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전국의 한자를 공모하여, 12월 12일 '한자의 날'을 기념, 교토 청수사에서 발표한다. 2025 '올해의 한자'는 '금(金)'. 시대를 반영하는 다양한 해석이 뒤따랐다.

자칫 어렵고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한자라는 콘텐츠와 최첨단 IT가 만나 펼쳐 보이는 프로그램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며 한자 놀이의 세계에 빠지게 만든다. 한자말 물고기를 낚아 올리면 그것이 초밥이 되어 올라오고, 내 몸을 이용해 한자를 만들어보고, 상형문자인 한자의 원리를 애니메이션으로 터득하다 보면 한자공부는 어느새 재미난 놀이가 된다. 또 감탄을 자아내는 건 한자사전 '대한화사전'에 수록된 5만자의 한자로 구성된 '5만자 타워'. 박물관 중앙에 위치한 기둥 형태의 전시물로 일본에서 사용되는 주요 한자 5만 자가 새겨져 있어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단순한 한자 구경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문화와 역사를 체험하고, 한자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키는데, 한자 교육을 조금이라도 받은 사람이라면 전혀 낯설지 않은 곳이다.

1층에는 한중일 공용한자 808자를 알려주는 코너도 있다. 한중일 세 나라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한중일 30인회'가 제정한 '공용한자 808자'는 세 나라의 일상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기본한자들이다. 공용한자 제정의 필요성은 한국에서 처음 제기했으며, 서울에서 500자가 선정됐고, 일본에서 800자로 늘렸다. 그리고 중국에서 29자를 넣고, 덜 쓰이는 21자를 빼면서 808자가 되었다. '문화의 축이 서구에서 아시아로 옮겨지고 있는 이때 한중일 공동 상용한자를 제정함으로써 새로운 아시아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는 언론보도도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 교토 한자박물관 전시장
일본 교토 한자박물관 전시장.
중국의 간화자(簡化字), 일본의 약자(略字)보다 정자(正字)를 쓰는 우리가 한자권의 종주국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약 10억명 정도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적 전통을 물려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보다 훨씬 많은 20억명 정도는 고대 중국의 지적 전통을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희랍어, 라틴어의 전통과 한자의 전통이 철학과 문명, 사고방식의 차이를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한국인에게 한자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공용한자 808자' 교육을 소홀히 하는 곳이 바로 한국이란 사실이 슬프다.

전시장을 지나면서, '우리말 한자'만이라도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 영어, 한자가 뒤섞인 혼란의 극복방법을 찾아야 하고, 우리말과 결합된 한자의 바른 사용법도 가르치고, 일본어투 한자를 잘못 사용하는 사례를 고치기 위해서라도. 어떤 이는 문화재 답사길에서 만난 전각이나 편액의 뜻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자어를 한자로 쓰지 않고 한글로 쓰면 그 의미는 사라지고 소리만 남기 때문이다.

한자의 다양성을 알려주는 전시물
한자의 다양성을 알려주는 전시물.
학교에서는 한자를 배우지 않아 고전은 달달 외지만, 생활한자는 모르는 세태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말을 지키려면 한자도 지켜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고 싶다. 한자는 중국의 문자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문자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나름의 독특한 문자문화를 이루었다. 이렇듯 한자 문화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넓다. 개관 당시에는 일본어 중심이었지만, 2017년 중반부터 영어, 중국어, 한국어 등의 오디오 가이드를 도입해 외국인 방문객 편의를 지원하고 있다.

교토 한자박물관을 평가할 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식의 상투적인 치사는 안 된다는 묘한 절박함을 느낀다. 왜 우리는 가질 수 없는가. 양반문화, 선비문화, 유교문화를 고양하는 지역에서, 또는 어느 자랑스러운 문중(門中)에서, 또는 향교, 서원, 서당에서 우리도 '눈 밝은' 한자박물관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된 미래',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이런 열쇳말들이 꿈틀대는 것 같다.

/김정학 (前 대구교육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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