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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맥락 상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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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0. 21. 17:34

의도적 사실 편집·누락, 맥락 상실
맥락은 의미 규정, 모르면 진실 오인
맥락 상실 정보 과소비 사회 위험
김명호
김명호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
짧은 사고를 세 관점의 장면으로 구성한 30초짜리 흑백 동영상이다.

# 장면1: 불량스러운 백인 젊은 청년이 형사가 탄 듯한 차를 피해 여인이 서 있는 골목으로 뛰어든다. 굵고 딱딱한 목소리가 '어떤 사건을 한 가지 관점에서 보면 한 가지 인상만 남는다'고 설명한다.

# 장면2: 반대 각도의 카메라 앵글은 그가 뛰어가는 목표가 여인을 지나쳐 양복 입은 중년남성임을 알려 준다. 명백히 중년남성을 공격하거나 서류가방을 빼앗으려는 것 같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인상이 남는다'는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 장면3: 전체를 내려다보는 각도의 카메라는 공사장 건축자재 더미가 중년남성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위험한 상황을 보여준다. 뛰어간 청년이 그를 밀친다. 직후 건축자재가 길바닥에 떨어져 공사장 일부가 무너진다. 중년 남성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알려면 전체 그림을 봐야 한다'는 설명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영국 신문 가디언이 1986년 만든 'Points of View(관점들)'이란 흑백 홍보영상으로, '형사에게 쫓기는 불량 청년·중년 남성 공격 상황… 알고 보니 진실은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공정하고 균형 있는 관점의 저널리즘을 지향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다. 마치 정치적 편향성과 의도가 없는 가디언을 봐야만 전체 그림, 즉 맥락과 진실을 알 수 있다는 듯이. 굉장한 성과를 거둔 이 영상은 역대 제작된 홍보물 중 가장 탁월한 하나로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는다.

조각조각 난 사실을 내밀며 전체 맥락을 오인하게 만드는 일들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주변에서 너무 많이 일어난다. 특히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내용을 담은 정보를 허위조작정보(disinformation)로 규정한다. 사실이 아닌 걸 들이대는 거짓말은 금방 들통 난다. 허위조작정보를 만드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조각난 사실 몇 개를 제시해 그럴듯한, 그렇지만 왜곡된 맥락으로 이해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이런저런 정황과 사실 일부분이면 충분하다.

기술 발달로 사회가 정보 과잉 상태에 접어든 지 오래다. 이제는 정보 과잉을 넘어 맥락 상실의 시대로 들어섰다. 뉴스는 많고 새로운 정보는 차고 넘치는데 대부분 한 줄 제목과 짧은 영상으로 소비된다.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 홍보에는 정책 설명과 행정부 감시 능력이 아니라, 국정감사에서 격노하고 욕에 가까운 비속어를 퍼붓는 보좌관 휴대폰의 '짤' 영상 제작이 더 효과적이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는 알릴 필요도 없다. 소비자들의 즉흥적 감정 반응을 활용하는 게 더 빠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맥락은 사라지고 이 감정의 속도를 단기간으로 이용할 뿐이다.

이런 현상은 정보 제공자의 의도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적지 않은 정보 소비자가 이를 원하고, 환호하기 때문이다. 이를 정치적 팬덤 현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맥락 없는 정보의 공급과 수요는 개인은 물론 공동체를 갉아먹는다. 맥락을 잘라내는 편집으로 의도적인 관점을 형성케 하거나 다수 의견을 창조할 수 있다. 맥락은 의미를 규정하는 기능이 있으므로 가능하다. 이런 맥락의 편집은 궁극적으로는 서로를 값싸게 취급하고, 전체를 수준 이하로 떨어뜨린다. 동영상에서 보듯 사실을 편집하거나 맥락을 왜곡하면 엉뚱한 프레임이 형성된다.

맥락 상실은 표현이나 단어의 교묘한 왜곡이나 누락으로도 한다. 1974년 베트남전, 미군 항공기가 캄보디아를 폭격했다. 당시 미 공군 공보장교는 언론에 이렇게 설명했다. "You always write it's bombing, bombing, bombing. It's not bombing! It's air support!"(당신들 자꾸 폭격이라고 쓰는데 폭격이 아니야. 공중 지원이라고!) 그해 미국영어교사협회(NCTE)는 '공중 지원'이라고 표현한 공보 장교를 제1회 더블스피크(doublespeak)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 상은 가장 애매모호하고 핵심을 흐리는 언어를 사용한 개인이나 단체에 비꼬는 취지로 주는 것이다. 수상 대상 표현으로는 '대안적 진실'(1기 도널드 트럼프 취임식 참석 숫자를 왜곡) '강화된 심문 기법'(미 정부가 공식 허용했던 물 먹이기 등 테러용의자에 대한 CIA의 사실상 고문 방법) 등이 있다. 단어가 주는 힘이 있으므로 단어는 관점과 맥락을 은연중 제시해 준다. 정치 세력이나 특정 단체들이 자주 쓰는 이른바 네이밍(naming)이나 조어(造語)는 이런 효과를 노린다.

의도적으로 진실을 편집할 수 있다. 일부 사실과 정황을 짜깁기하면 충분히 그렇다. 의도적 누락과 편집으로 일어난 맥락 상실은 가짜 뉴스가 창궐하는 근본 원인이다. 맥락 확인 없이 어떤 상황을 판단하거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건 개인뿐 아니라 가족, 공동체 이익을 현저하게 해친다. 나아가 황당한 결정으로 자기와 주변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짤과 자극적 제목, 감성과 즉자적 대응이 횡행하는 맥락 상실의 정치와 사회, 그래서 아슬아슬하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김명호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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