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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매운맛의 나라'가 본래 향신료 빈곤의 땅이었다는 사실이다.
계피나 후추, 강황처럼 다양한 향신료를 얻기 어려웠던 한반도의 기후와 지리적 여건 속에서, 한국인은 고추 하나로 새로운 미각 체계를 만들어냈다.
소금조차 귀하던 시대에 고추는 짠맛을 대신하고, 발효식품의 부패를 막으며, 색과 향을 입히는 다기능 향신료로 자리 잡았다.
한정된 자원 속에서도 삶의 지혜를 발휘해 맛의 세계를 확장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제약이 낳은 창조'라는 한국적 창의성의 원형이 시작된다.
이 정신은 오늘날 K-푸드의 세계적 성공으로 이어지고 있다. 불닭볶음면, 김치, 떡볶이처럼 단순한 재료로 만든 음식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는 풍족함이 아닌 부족함 속에서 태어난 혁신의 결과다. 제약을 불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 한국인의 특유의 변용 능력, 이것이야말로 한국식 창조의 DNA다.
오늘날 우리 농업도 이와 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고령화와 인력 부족, 기후위기와 생산비 상승, 농촌 인구 감소 등 복합적인 제약 속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생존이 어렵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 제약이 혁신의 토양이 될 수 있다. 농업은 더 이상 1차 산업이 아니라, 인공지능(AI), 데이터, 생명공학, 로봇기술이 융합된 미래 산업으로 재편되고 있다.
문제는 여전히 농업 현장이 보수적이고, 창의적인 실험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편적 재정 지원이나 제도적 보호가 아니라 '작은 실패를 감내할 수 있는 창조적 생태계', 즉 농산업 벤처의 활성화다.
농식품 분야 벤처기업들은 이미 이런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인공지능으로 병해충을 진단하는 기술, 미생물을 활용한 친환경 농자재, 식품 부산물을 재활용하는 순환경제형 푸드테크 기업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대규모 자본보다 아이디어와 실행력을 무기로 삼고, 농업의 구조적 한계를 새로운 기회로 바꾼다.
농식품 창업콘테스트, 농식품 테크 스타트업 창업 박람회(AFPRO) 등은 이런 혁신이 실제 산업으로 이어지도록 돕는 중요한 플랫폼이다. 과거 고추 하나가 한국인의 미각을 바꿨듯, 이들 벤처가 농업의 체질을 바꾸는 '다음 세대의 고추'가 될 수 있다.
결국 제약은 위기가 아니라 창조의 조건이다. 농업의 제약이 커질수록, 이를 돌파할 새로운 해법과 기술이 필요하다.
정부와 공공기관은 농업 벤처가 자유롭게 실험하고 실패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농업이 다시 산업으로, 산업이 문화로 확장되는 길이다.
한국의 매운맛이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결핍을 이겨낸 창조의 결과였듯, 농산업의 미래도 같은 길 위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존이 아닌 '창조적 파괴'다. 익숙한 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 제약이 많을수록 혁신의 에너지는 강해진다. 이제 한국 농업이 세계 속에서 또 한 번 '매운 창조'를 펼쳐낼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