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경계 위에서, 지속 가능한 스포츠 생태계를 모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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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아직 필드를 달리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진행 중이다. 경기의 결과가 정해지기도 전에 새로운 계약이 서류 위에 찍히고, 다음 해의 리그 구도는 경기장 밖에서 다시 짜인다. 시즌이 끝나가는 지금, 축구의 무게 중심은 점점 필드 밖으로 옮겨지고 있다.
자본은 언제나 경기보다 빠르지만, 그것만으로 축구의 방향을 설명할 수는 없다. 세계의 리그가 자본의 질서 속에서 재편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자본이 살아 움직이는 이유는 여전히 지역의 지속성 때문이다. 한때 축구는 도시의 자존심이었고, 그 기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지역의 팬들은 구단이 존재하기를 원하고, 기업은 그 열정 속에서 브랜드의 신뢰를 얻는다. 서로의 필요가 맞물리며 산업의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오늘날 유니폼에는 기업의 로고가 선명히 새겨져 있지만, 그 로고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팬이 그 이야기를 믿기 때문이다. 돈이 리그를 움직이지만, 그 돈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사람과 도시다. K리그는 그 교차점 위에서 산업의 구조와 공동체의 지속성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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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가 프리미어리그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인수한 것은 국가 자본이 스포츠를 외교·산업·이미지 전략의 일부로 활용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 카타르 스포츠 인베스트먼트(QSI)는 파리 생제르맹(PSG)을 통해 미디어·패션·디지털 콘텐츠가 결합된 복합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모델을 만들었다. 아부다비의 시티풋볼그룹(CFG)은 맨체스터시티를 중심으로 일본, 미국, 호주, 스페인 등 전 세계 5개 대륙에서 13개 프로축구단을 완전 또는 지분 참여 형태로 거느리며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들은 선수단 운영을 넘어, 팬 데이터 관리와 콘텐츠 제작, 브랜드 협업까지 하나의 비즈니스 생태계로 통합한다. 구단은 더 이상 지역의 상징이 아니라, 글로벌 포트폴리오의 일부가 됐다.
이 구조의 핵심은 단순한 '자본의 투입'이 아니라 '자본의 운영 방식'이다. CFG는 각 구단의 전술 철학과 데이터 시스템을 통합해 선수 이동의 효율을 높이고, QSI는 PSG를 중심으로 미디어 파트너십을 확장하며 콘텐츠를 산업화했다. PIF는 뉴캐슬을 통해 자국의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고, 다른 스포츠 종목(LIV 골프, 포뮬러원 등)과 연계한 종합적 투자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돈이 경기장을 넘어 산업 전체를 설계하는 시대, 구단의 가치는 승리보다 브랜드 네트워크의 확장성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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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중국 슈퍼리그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부동산 자본의 급격한 유입으로 화려한 외형을 만들었지만, 리그의 제도적 장치는 따라가지 못했다. 거품이 꺼지자 광저우 헝다, 톈진 등 다수 구단이 해체됐고, 국가대표급 선수의 급여 체불과 투자 철회가 이어졌다. 자본은 팬의 열정보다 빠르게 이동했다. 두 리그의 결과는 자본이 리그의 주체가 될 때 필요한 '철학의 방향'을 보여준다.
K리그의 현실은 이 두 흐름 사이에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자료에 따르면 다수의 구단은 여전히 모기업의 후원금이나 지방정부의 예산에 의존하고 있다. 시민구단은 지자체 예산이 전체 운영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기업구단은 광고비와 사회공헌 예산으로 팀을 유지한다.
리그 전체 중계권료는 연간 약 100억 원 수준에 머물러, 구단당으로 환산하면 자립 구조를 만들기 어렵다. 대부분의 팀은 모기업 후원금이나 지방정부 예산에 의존해 운영된다. 겉보기에는 일정한 운영이 유지되지만, 실상은 불안정하다. 모기업의 경영 상황이나 지방정부의 재정 여건이 바뀌면 지원이 줄고, 팀은 곧바로 위기를 맞는다.
외부 자본이 진입하기에는 수익 모델이 제한적이며, 재정 투명성을 평가할 명확한 기준도 아직 자리 잡지 못했다. K리그는 '공공의 자산'이라는 명분 아래 유지되고 있지만, 바로 그 공공성 때문에 시장의 활력은 오히려 제약받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예산 문제가 아니라, 공공과 시장 사이의 제도 설계의 결과다.
이러한 구조적 제약 속에서도, 일부 선도 구단들은 기업 및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미래를 위한 자생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K리그의 스폰서십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기업들은 단순히 광고 노출을 목적으로 로고를 붙이는 대신, 구단과 공동 기획을 진행하며 브랜드의 서사를 함께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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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스틸러스는 철강의 상징성을 산업 이미지에만 묶어두지 않는다. 모기업 포스코그룹의 ESG 비전 'Green Tomorrow'와 보폭을 맞춰 포항스틸야드에서 재활용 캠페인과 탄소 저감 활동을 정기 운영하며 '철강에서 녹색으로'의 전환을 마케팅과 현장에서 동시에 실천한다.
제주SK FC는 중립석 올 팬 존을 도입해 홈과 원정의 경계를 낮추고 관람 경험을 확장하고 있다. 2025시즌 명칭을 '제주유나이티드'에서 '제주 SK FC'로 바꾸며 기업의 책임과 지역 정체성을 이름에 분명히 새겼고, 지역 기업 협업과 캠페인으로 브랜드와 공동체의 결합을 넓혀가고 있다.
FC서울은 글로벌 팬층을 겨냥해 SNS와 유튜브 운영을 강화하고 영어 자막을 기본 지원하며 'Seoul's Moment', 'Ask Seoul Players' 같은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여기에 제시 린가드 영입으로 디지털 노출과 해외 팬 유입 통로를 넓혔고, 그의 개인 브랜드와 구단 마케팅을 결합한 콘텐츠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구단이 기업의 언어로, 기업이 팬의 언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스폰서십은 더 이상 광고 계약이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 공동체를 구축하는 실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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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본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리그의 철학은 더 단단해야 한다. 자본은 리그를 성장시킬 수 있지만, 방향까지 결정하게 두면 리그의 색이 사라진다. 유럽의 리그들은 이미 그 균형의 중요성을 체험했다.
UEFA는 '재정적 페어플레이(FFP)' 제도를 통해 투기적 자본의 유입을 제한하고, 프리미어리그는 '적격 오너 테스트(Owners' and Directors' Test)'를 운영해 구단주의 자격과 자금 출처를 심사한다. 프랑스 리그는 DNCG(Direction Nationale du Controle de Gestion)라는 독립 감독기구를 두어 구단의 예산과 회계를 정기적으로 심사하며, 기준 미달 시 선수 등록 제한이나 강등 조치까지 내릴 수 있다.
이런 규제는 단순한 통제 장치가 아니라 리그의 신뢰를 지키는 최소한의 장벽이다. K리그 역시 외국 자본의 유입을 대비하되, 리그의 운영 원칙과 감독권을 스스로 쥐고 있어야 한다. 돈의 방향이 아니라 리그의 철학이 산업의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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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K리그는 지방정부 예산과 모기업 후원에 이중으로 의존하는 불안정한 구조를 벗어나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단기적 흥행보다 장기적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면, 리그는 더 넓은 시장과 자율적 운영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이는 리그 차원의 공동 마케팅과 재정 투명성 강화, 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자율적 거버넌스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 결국 리그의 산업화란 단순히 자본을 끌어오는 일이 아니라, 자본이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신뢰의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돈의 흐름은 언제나 바뀐다. 그러나 그 물결 위에서도 리그의 철학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자본은 연료이고, 사람은 엔진이다. 선수의 땀과 팬의 목소리, 그리고 도시의 공기가 함께 움직일 때 자본은 비로소 머무른다. 머무른 자본이 산업을 키우고, 그 산업이 다시 사람을 움직인다. K리그가 진정한 산업의 중심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아니라 철학이 방향을 정해야 한다. 지금 K리그가 서 있는 곳은 자본의 경계이자, 철학의 출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