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 보수의 상징…트럼프와는 대립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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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니는 전통적으로 '조연'으로 여겨지던 부통령직을 권력의 핵심으로 끌어올린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백악관의 지하 벙커에 머무르며 국가안보 대응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냉정한 표정과 절제된 언어로 정책을 주도했지만, 부시 대통령조차 "국민이 보기엔 행정부의 다스 베이더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권위적이고 비밀스러운 이미지로 각인됐다.
체니는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고강도 안보정책을 주도했다. 그는 "국가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며 부시 행정부의 모든 결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말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딸 리즈 체니 전 하원의원이 트럼프의 대선 불복을 조사하자, 그는 "트럼프는 미국 공화국 역사상 가장 큰 위협"이라 말했다. 2024년 대선에선 "트럼프를 막기 위해 민주당의 카멀라 해리스 후보에게 투표하겠다"고 밝혀 공화당 내 논란을 일으켰다.
백악관은 체니의 별세 소식 이후 조기로 국기를 내렸지만, 트럼프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심장병으로 다섯 차례 심장마비를 겪고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그는 "매일이 선물처럼 느껴진다"고 말하곤 했다.
체니는 이라크 침공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켰지만, 전쟁의 명분은 허물어졌다. 그가 주장한 9·11 연계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이라크인들은 해방자를 환영할 것"이라는 말도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전쟁은 이라크 내전을 불러왔고, 수십만 명이 희생됐으며, 이슬람국가(IS)와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등장했다.
네브래스카 주에서 태어나 와이오밍 주에서 성장한 체니는 예일대를 중퇴한 뒤 와이오밍대로 돌아가 학업을 마쳤다. 1968년 의회 펠로로 워싱턴에 들어오며 정계에 입문했다. 1975년 34세의 나이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고, 이후 와이오밍주 하원의원으로 6선을 지냈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는 '아버지 부시'인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맡아 걸프전을 지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