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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인사이트] 어느 노동변호사의 변심, 국가를 변화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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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1. 09. 17:54

- 사민주의자 노동변호사 리콴유, 공산주의자와 '인민행동당' 결성해 집권 성공
- 그러나 집권 후 공산주의자들과 결별
- 싱가포르의 국가생존 위기에 낮은 법인세, 자유무역, 노사관계 개선으로 외국자본 유치
- 인민행동당, 싱가포르의 1인당 GDP를 세계 4위로까지 올려놓아
- 기이치 미야자와 전 일본수상, "리콴유의 일대기는 각국 리더가 본받아야 할 '세계 최초의 나라 만들기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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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희 한양대 경영대 교수
중국 화교출신인 그는 대학시절 마르크시즘에 관심을 가졌으나, 과격한 공산주의자들의 극단적 활동을 혐오했다. 그래서 폭력혁명을 배제한 사회민주주의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법대를 나와 변호사 개업을 한 후엔 자신의 이념에 따라 노동변호사의 길을 선택했고, 중요한 투쟁의 선봉에 서서 승리를 얻어냈다. 그 결과 그는 수년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해 온 화교 노동계의 폭넓은 지지와 존경을 얻게 됐다.

이를 배경으로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여 사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절반씩으로 구성된 새로운 정당을 창당했다. 당명은 '인민행동당'(PAP, People's Action Party). 인민행동당은 노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집권에 성공한다. 이는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노동변호사 출신 리콴유의 이야기이다. 인민행동당은 현재까지도 싱가포르 부동의 집권정당이며, 가난하던 싱가포르를 1인당 GDP 세계 4위의 경제강국으로 올려놓았다.

싱가포르 건국의 주역 리콴유가 처음부터 자유 시장경제 이념에 따라 경제시스템을 구상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역사가 그렇겠지만, 싱가포르의 역사도 그렇게 단선적으로 흘러오진 않았다. 영국 유학시절부터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매료된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당시 자신을 '좌익 민족주의자'로 스스로 표현했다.

싱가포르 공안당국은 그를 위험인물로 지목하여 지속적으로 관찰해 왔으며,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리콴유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싱가포르 지하공산당 조직과의 은밀한 제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창당한 인민행동당의 초기 강령에는 '비공산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그가 1959년 35세에 집권하여 총리가 된 후, 노조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달라졌다. 집권 후 그의 첫 업적은 정부 적자를 줄이기 위해 공무원 노조와 대결하여 임금을 삭감한 것이었다. 그는 집권해 보니 과거 방식으로는 국가운영이 어려운 것을 깨달았다고 자서전에 회고하였다.

결국 당에 포진해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한 리콴유는 얼마 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되고 영국군마저 싱가포르에서 철수하자, 고립무원의 실존적 위기 상황에서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연히 낮은 법인세와 함께 자유무역 정책을 폈고, 기존의 적대적 노사관계도 어떻게든 개선하려 했다.

이를 위해 리콴유는 1968년 강력한 고용법과 산업관계법을 제정하여 노조의 파업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 해에 100건이 넘던 파업이 1969년에는 3건으로 줄어들었고, 1970년대에는 거의 파업이 사라지게 되었다. 싱가포르 노조는 기존의 전투적 투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정부와 기업과 협력해 국가형성(Nation-building)에 동참하는 비전으로 새출발하였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1970년대 다국적 기업들이 대거 싱가포르에 투자하며 경제성장을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1970년 이후 리콴유는 거의 매년 홍콩을 방문하며, 홍콩이 싱가포르보다 앞서가는 이유가 자유 시장경제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나마 남아있던 복지국가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그 후 리콴유는 자신이 꿈꾸던 영국식 복지국가 모델이 "지극히 게으름을 조장하고 결국 국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이라고까지 비판했다.

리콴유의 이런 변신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지조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싱가포르의 경제기적에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의 이유 있는 변심이 있었다는 점이다. 기이치 미야자와 전 일본수상은 리콴유의 일대기에 대해 '세계 최초의 나라 만들기 교과서'라고 극찬하며, 다른 국가 리더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분명 우리나라도 포함될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웅희 한양대 경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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