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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고, 바래고, 사라지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유쾌한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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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26. 02. 26. 15:03

'소멸의 시학'전, 박제된 예술 거부하고 '삭는 미술'의 미학 조명
달걀노른자 회화부터 커피 찌꺼기 토양까지… "사라짐은 또 다른 생성"
소멸의 시학_삭는 미술에 대하여_전시 전경 11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관에서 선보이고 있는 전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작품을 수집하고,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는 공간이라는 인식은 오랫동안 당연한 전제였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관에서 선보이고 있는 전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는 이 전제를 근본부터 흔든다. 갈라지고, 바래고, 썩고, 결국 사라지는 작품들. 그것도 미술관이 의도적으로 '소멸'을 허용하고 설계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도발적이다.

제목에 쓰인 '삭다'라는 단어에는 '썩다'와 '발효돼 깊은 맛이 들다'라는 상반된 의미가 공존한다. 소멸을 파괴나 실패가 아니라, 또 다른 생성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전시 전체를 관통한다. 변하지 않는 것만이 가치 있다는 미술계의 오랜 신념을 정면으로 되묻는 시도다.

이은재,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 2023, 나무 패널에 달걀 노른자, 240 × 130 cm. 작가 제공. 사진_이은재.
이은재의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 /작가 제공
전시장에 들어서면 이은재 작가의 회화 작업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이 관람객을 맞는다. 나무 패널 위에 달걀노른자를 한 겹 한 겹 쌓아 만든 화면은 패널마다 미묘하게 다른 노란색을 띤다. 사용된 달걀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핵심은 완성 이후에 있다. 시간이 흐르며 화면은 갈라지고, 색은 바래진다. 작가는 "그림이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와, 그래도 잠시만은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동시에 담았다고 말한다. 회화의 영속성을 스스로 거부하는 태도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이은경 작가의 벽화 '소멸의 빛'은 전시 중 사라지는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바다 조류에서 추출한 스피룰리나 안료로 그린 이 벽화는 빛에 극도로 취약하다. 전시장에 설치된 태양광 전구 아래에서 약 한 달이 지나면 색은 거의 완전히 사라진다. 관람객은 전시 기간 동안 벽화가 점점 희미해지는 변화를 직접 목격하게 된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아사드 라자 작가의 설치작 '흡수'는 이번 전시의 성격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커피 찌꺼기, 택배 상자, 닭 뼈, 은행, 이면지 등 서울에서 수집한 각종 부산물로 만든 비옥한 토양이 전시장 바닥을 채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작품을 위해 일반인 '경작자'를 모집했다. 이들은 전시 기간 내내 토양을 돌보며 부산물이 흙으로 변하는 과정을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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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드 라자의 설치작 '흡수'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라자 작가는 "대부분의 작품은 전시 전에 제작이 끝나지만, 이 작업은 전시 기간 내내 계속 만들어진다"며 "관람객은 경작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흙을 가져갈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관람객은 다음 전시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이 흙 위를 밟고 지나가야 한다. 작품은 전시 대상이면서 동시에 관람 경험의 일부가 된다.

야외 전시장에서는 자연의 시간에 작품을 맡긴 작업들이 이어진다. 고사리 작가의 '초사람'은 미술관 정원에서 제초한 풀로 만든 조형물이다. 눈사람을 연상시키는 형체는 바람과 비, 계절의 변화 속에서 점차 무너질 예정이다. 김주리 작가의 '물 산'은 아파트 단지를 위에서 내려다본 형상을 흙을 다져 만든 작품으로, 마찬가지로 자연에 노출돼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두 작품은 해체되고 허물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싹이 돋아날 가능성 또한 열려 있다. 소멸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전시의 메시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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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리 작가의 '물 산'이 전시된 야외 전시장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동시대 환경 인식의 변화에 따라 미술작품 역시 달라지고 있으며, 이번 전시는 그 변화에 부응하는 급진적인 미술관의 모델을 상상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인류세 시대, 미술과 미술관은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흘려보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전시 전반에 깔려 있다.

이번 전시에는 국내외 작가 15명(팀)이 참여해 회화, 조각, 설치 등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사라지는 것을 허용하는 미술관, 그리고 그 과정을 공개하는 전시. '불후의 명작'이라는 통념 너머에서, 미술관의 역할을 다시 묻는 실험이 진행 중이다. 전시는 5월 3일까지.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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