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에서 이 역할을 대신한 것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며 세계의 경찰을 자처했다. 동맹국들은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경제 성장에 전념했고, 미국은 다소의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리더로서의 권위를 지켜 왔다.
하지만 최근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미국의 모습은 사뭇 낯설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는 외교 기조는 더 이상 보편적 평화인 팍스(Pax)를 말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이를 '팩트 아메리카나(Pact Americana)'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팩트(pact)는 말 그대로 '협약', 혹은 '계약'을 의미한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질서였다면, 팩트 아메리카나는 미국이 각국과 1대 1로 마주 앉아 철저히 손익을 계산하는 거래적 외교를 뜻한다.
과거의 동맹이 '혈맹'이라는 정서적·가치적 유대에 기반했다면, 이제 안보는 '구독 서비스'와 같은 상품이 되었다. 방위비 부담금을 충분히 내지 않거나 무역에서 미국에 이익을 주지 못하는 국가라면, 미국의 안보 우산은 언제든 접힐 수 있다는 서늘한 경고가 깔려 있다.
유엔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같은 다자간 기구의 힘은 약해지고, 미국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수 있는 양자 협상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세계 질서의 안정보다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실리적 목표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에게는 거대한 도전이다. 이제는 단순히 민주주의를 공유한다는 명분만으로는 미국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미국에 어떤 구체적인 이익을 줄 수 있는가를 매 순간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로마의 평화가 영원하지 않았듯 미국 중심의 질서 역시 변곡점에 서 있다. 평화가 '공공재'가 아닌 '거래 품목'이 된 지금, 대한민국 외교 역시 감상적인 동맹론에서 벗어나 철저하고 정교한 '협상가'의 자세를 갖춰야 할 때다.
미국이 내미는 '협약(Pact)' 의 청구서 위에 우리가 적어 넣을 수 있는 카드는 무엇인지 냉철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