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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대로] 대접받는 사람의 성숙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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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8. 2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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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욱 실장님(웹용)-최신
이경욱 논설심의실장
호주에서 3년 반 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격의(隔意) 없는 사회'였고 또 다른 하나는 '맨발 걷기'였다. 맨발로 동네 마트와 식당을 오갔던 기억이 새롭다. 동네가 깨끗하고 깨진 병이 없어 자연 친화적이었기에 그랬다.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비치 등 특정 장소가 아닌 집 주변을 맨발로 여유 있게 걸어 다녔던 기억은 여전히 강렬하다. 호주 거주 경험이 있었다는 한 유명 탤런트는 방송에 나와 호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게 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맨발로 동네를 돌아다녔던 것"이라고 말했다. 전적으로 공감했다.

맨발 걷기는 이 칼럼의 주제가 당연히 아니다. 먼저 언급했던 격의 없는 사회가 주제다. 격의 없다는 것은 지위 고하, 상하 관계, 더 나아가 갑을 관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호주인들은 '마이트(Mate)'로 모든 걸 해결한다. 친구(Friend)라는 뜻의 마이트는 영국식 영어 발음이다. 호주에 있는 동안 2명의 총리와 인터뷰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필자를 마이트로 불렀다. 특파원이라는 호칭 대신 그냥 마이트였다.

축구경기장에서도 몇 번 만나 즐거운 대화를 나눴던 케빈 러드 총리는 총리라기보다는 친근한 동네 아저씨와 같았다. 그가 시드니 시내에서 로위연구소 주최 세미나에 참석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을 찾았다. 러드 총리는 국제 정세에 대해 연설한 뒤 세미나장을 빠져나가 총리 전용 승용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우리가 상석이라고 생각하는 승용차 뒷좌석 오른쪽(호주는 왼쪽)에 타지 않았다. 기사 옆 조수석에 탔다. 일정이 바쁜 총리겠지만, 총리 전용 승용차는 신호등을 기다렸다. 경찰이 나와서 교통을 통제하는 모습은 없었다. 한 번은 축구경기장에서 러드 총리를 우연히 만났다. 이미 인사를 나눈 터라 정말 반갑게 맞이해 줬다. 함께 갔던 가족과 사진을 찍자며 끌어당겼다. 격의가 없어도 한참 없었다. 그 이후도 공식, 비공식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경호원이나 수행원의 제지는 당연히 없었다.

또 다른 총리는 줄리아 길러드였다. 언젠가 그와 인터뷰하기 위해 시드니 시내 총리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총리는 호주 수도 캔버라에서 주로 근무한다. 정치, 외교 중심지가 캔버라라고 한다면 경제 중심지는 시드니여서 시드니 출장이 잦다. 시드니에 사무실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인터뷰 장소에서 만났다. 인터뷰 사진을 찍기 위해 의자를 다시 배치해야 한다고 하자 총리는 벌떡 일어나서 의자를 옮겼다. 옆에는 수행비서와 경호원이 있었지만, 그들은 선 채로 있거나 신문을 뒤적일 뿐이었다. 인터뷰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려고 했다. 엘리베이터에는 이미 길러드 총리와 경호원, 수행원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었다. 총리는 내게 손짓했다. 빨리 타라고.

두 총리 모두 필자가 타국에서 온 특파원이기에 일반인들과 달리 남다른 대응을 했다고 하기에는 말과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의도적으로 격의 없는 입장을 취했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일상의 언행이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세계 5대 수출 왕국, 정보기술(IT) 강국에다 반도체 선진국, K-컬처 등등 요즘의 대한민국은 세계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치안이 뛰어난 나라, 대중교통망이 잘 갖춰진 나라 등등 많은 칭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상하 관계나 직장 내 갑질 등 성숙하지 못한 문화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노태악 전 선거관리위원장(전 대법관) 등 일부 기관장들이 보여준 행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성숙도가 선진국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책을 맡은 기관장이기에 해외 출장을 당연히 가야 한다. 외국에서 초청했을 수도 있겠고, 기관에서 출장 사안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배우자 동반 출장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불구하고 관행이어서,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며 가볍게 지나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떤 인사보다 사회의 모범이 되고 청렴과 공정에 관해 솔선수범해야 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당사자 스스로 관행이니 괜찮겠거니 하고 생각하기에 앞서 과연 이게 상식과 투명함, 공정에 어긋나는 것인지 늘 자문자답해야 한다. 관행이라며 등 떠민 부하직원 역시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국민 눈높이를 고려해 제도를 진작 손질했어야 한다. 이들이 절제와 성숙함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래서 국민의 공분을 샀다.

제도와 관행에 편승해 국민 눈높이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자신의 이익과 편의만 앞세운 인물들이 여전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성숙함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지금도 관행이라는 그늘에 숨어 성숙함을 외면한 채 관행을 누리고 있는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관행성(性) 구태의연한 행태가 하루속히 사라져야 진정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끝이 있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남의 대접을 받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다. 대접받는 위치에 있는 인물들의 성숙함을 기대한다.

이경욱 논설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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