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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학의 내가 스며든 박물관] 에스토니아 디아스포라의 위대한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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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9. 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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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캐나다 토론토, 에스토니아 박물관 '베무(VEMU)'
김정학_애스토니아 1
베무가 있는 타르투 칼리지 건물베무가 있는 타르투 칼리지 건물.
캐나다 토론토의 유서 깊은 타르투 칼리지(Tartu College) 건물에 들어서면, 우리는 세대를 넘은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어떻게 정리되고, 어떻게 생명력을 얻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감동의 현장을 만나게 된다. 다운타운, 310 블루어 스트리트 웨스트. 콘크리트의 질감이 두드러진 모더니즘 양식의 큰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토론토 대학 학생들의 기숙사로 잘 알려진 이 건물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거주 공간 같지만, 그 내부에는 전 세계의 디아스포라 커뮤니티가 부러워하는 현장, 소위 '문화적 성취'라고도 불리는 '베무(VEMU)'가 숨쉬고 있다. 인구 130만명 남짓한 발트해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에서 온 이민자들이 토론토 한복판에 일궈낸 이 거대한 아카이브는, 여러 이민 사회에 깊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 나는 이 작은 공동체가 북미의 토론토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보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에스토니아 이민의 역사는 한 편의 비극적인 대서사시다. 특히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재점령을 피해 쪽배에 몸을 싣고 발트해를 건너야 했던 7~8만명의 난민들이 겪은 '대탈출'은 오늘날 캐나다 에스토니아 공동체의 뿌리가 되었다. 이들은 낯선 땅 캐나다에 정착하며 흘린 피와 땀, 그리고 모국을 향한 그리움을 모아 이 '기억의 요새'를 세웠다. 특히 2021년 여름, 토론토 에스토니아 하우스에 있던 중앙 아카이브(EKK)의 500박스 이상의 소장품을 베무로 옮긴 일은 자신들의 역사 보존을 위해 어떻게 애썼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한 짐 옮기기가 아니라, 1960년대부터 선배 세대들이 모아온 일기, 편지, 책 등 민족의 영혼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정중히 모시는 의식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현재 베무가 위치한 타르투 칼리지는 이민 1세대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수익형 부동산으로, 박물관 운영의 든든한 경제적 엔진이 되어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바로 2028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박물관 건물과, 그 옆에 세워진 최첨단 문화 허브 '케스쿠스(KESKUS)'로의 도약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스토니아 공동체의 탁월한 전략을 엿볼 수 있다. 베무가 박물관으로서 에스토니아 이민자들의 역사와 기억을 깊이 있게 보관하는 '두뇌와 서재'라면, 케스쿠스는 에스토니아인과 토론토 시민들이 한데 모여 미래를 도모하는 '거실이자 광장' 역할을 한다. 과거를 지키는 힘과 미래를 여는 혁신이 상호보완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이들의 이중 전략은 참으로 영리하고도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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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EKK 소장품을 VEMU로 옮기는 자원봉사자들
베무에서 준비하고 있는 차세대 프로젝트 중 가장 기대되는 것은 2028년 개관과 함께 선보일 대형전시 '영혼의 풍경(Soulscapes)'. 이 전시는 단순한 유물의 나열을 넘어 감정과 경험, 그리고 지식을 융합한다. 보트를 타고 낯선 바다를 건너던 공포의 탈출 경험부터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되었는가'에 대한 철학적 해답까지 담아낼 예정이다. 이는 역사를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로 바꾸려는 노력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베무는 의미 있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2026년 9월 14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도 주목해야 한다. 타이틀은 "캐나다에서의 성장(Growing up in Canada)". 1944년 탈출 이후 80년 동안 캐나다에서 어떻게 에스토니아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는지, 특히 아동과 청소년 교육에 집중했던 그들의 삶의 전략을 다시 볼 수 있는데, 에드가 마르텐 교장(1920~2020)과 같은 헌신적인 교육자들의 기록을 통해, 언어와 문화를 잃지 않으려 했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그들만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문화적 자부심은 매년 열리는 '에스토니아 음악 주간(Estonian Music Week)'에서 절정에 달한다. 에스토니아인들은 노래와 문화적 연대로 독립을 이뤄낸 경험을 지녔고,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노래하는 혁명'의 후예들로 불린다. 그들은 이 축제로 토론토에 에스토니아의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박물관이라는 정적인 공간에 음악이라
는 동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어, 젊은 세대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뿌리와 연결되도록 만드는 이들의 감각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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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 "캐나다에서의 성장(Growing up in Canada)" 포스터
이제 베무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캐나다라는 모자이크 사회에 어떤 고유한 무늬를 새겨 넣고 있는가?"라고. 에스토니아인들이 벽돌을 쌓아 타르투 칼리지를 세우고, 엄청난 기록물을 소중히 옮기며 역사를 지켜냈듯, 우리도 이제 기억의 벽돌을 쌓아야 한다. 베무와 케스쿠스가 보여주는 정체성 보존의 상호보완적 모델은 우리 커뮤니티가 나아가야 할 명확한 이정표가 아닐 수 없다. 에스토니아인의 역사가 담긴 낡은 일기장 한 권이 박물관의 보물이 되듯, 한국인들의 고단했던 이민 초기 기록들도 엄연한 역사로 새겨져야 한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지 않으며, 기억되지 않는 민족은 결국 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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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년에 선보일 대형전시 '영혼의 풍경(Soulscapes)' 상상도
베무는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라 제 나라를 바르게 기억하기 위해 타국에 세운 위대한 학교다. 이 작은 나라의 거대한 성취, 이 실천의 역사가 세계의 디아스포라들에게 깊은 울림과 의미 있는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다. 베무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정체성은 지키는 자의 것이며, 그 정체성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빛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바로 그 사실이다.

/ 前 대구교육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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