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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이쪽으로 줄을 서세요!”...수원역에서 징집돼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남자들은 이쪽으로 줄을 서세요!”...수원역에서 징집돼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기사승인 2020. 06. 2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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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이쪽으로 줄을 서세요!”

포성이 멎은지 70년이 지났지만 이희옥 할머니(75)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외침이다. 이 무심한 외침 속에 아버지는 떠나갔고, 할머니는 아직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깊이 패인 주름과 성성한 백발만이 70년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할머니는 1945년 태어난 ‘해방둥이’다. 할머니의 부친인 이규목(1924년생)씨는 일제강점기 시절 중학교 졸업 후 군수품 공장에서 근무하며 운 좋게 일제의 징집을 피했다. 해방되기 전 결혼을 하고 해방되는 해에는 딸을 얻는 기쁨도 누렸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했다. “쇠 다루는 솜씨가 좋았어. 해방되고 나서 시흥군(현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 대장간을 열었지. 낫, 호미, 괭이 같은거 만들어 팔았어. 장사도 잘됐던 것 같아.”

그러나 이런 소소한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며 포성이 시흥군 지척까지 들리던 날, 아버지는 할머니의 외갓집이 있는 남원으로 피난을 결정했다.

당시 5세에 불과했던 할머니를 데리고 시흥에서 남원까지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 유일한 장거리 이동수단이 기차뿐이었기에 할머니의 가족은 수원역까지 도보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기차편을 찾아보기로 했다. 할머니는 이때의 상황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시흥에서 수원역까지 하루를 꼬박 걸었어. 영등포역이 가깝긴 했지만 북쪽으로 올라가는 건 왠지 위험할 것 같다고 아버지가 수원으로 가자고 했어. 날짜는 언제인지 기억이 안나. 그런데 비가 왔던 건 확실해. 장마철이었으니까. 비를 맞으면서 계속 걸어가려니 춥고 배고프고..... 수원역 도착하니 다행히 비는 그쳤어. 보자기에 싸온 볶은 보리 먹으면서 허기를 달래고 있었는데 우리처럼 기차 타려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계속 모여들더라고.”

이 시기는 한강 방어선 전투가 벌어지던 1950년 6월 28일에서 7월 4일 사이로 추정된다. 7월 4일 이후로는 북한군이 서울을 완전히 장악하고 경부국도를 통해 남쪽으로 진격하기 때문이다.

할머니 가족이 하릴없이 기차를 기다리던 중 수원역 앞 광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트럭이 한 대 오더니 군인들이 내리더라고. 군인을 본 적이 없어서 사실 그땐 군인인줄도 몰랐어. 그런데 군인 중에서 한 사람이 역 입구로 가더니 ‘남자들은 이쪽으로 줄을 서라’고 소리치는거야. 몇 번이나 소리쳤는데도 몇 사람만 나가고 다들 우물쭈물 눈치만 보고 있었지. 그러니까 군인들이 사람들 사이로 막 비집고 들어와서 남자들보고 당장 나가서 줄서라고 강하게 떠밀더라고.”

할머니가 목격한 광경은 6.25 전쟁 초반 흔히 벌어졌던 가두징병이다. 개전 초기 패주를 거듭하던 국군이 궁여지책으로 소집영장도 없이, 팔다리 멀쩡한 젊은 남성이기만 하면 무조건 병력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군인이 와서 아버지에게도 나가서 줄서라고 하더라고. 아버지가 ‘아내하고 애만 두고 갈 수 없다’고 하니까 ‘가서 줄을 서야 기차를 탈 수 있다’면서 막 나가라고 떠밀었어.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던지...... 아버지가 ‘기차 타는거면 아내하고 애도 데려가겠다’고 버티니까 욕설까지 하면서 막 떠밀었지.”

결국 군인들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떠밀려 나가 줄을 섰던 이규목씨는 지금까지도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모진 세월을 오롯이 기다림으로 버티다 지난 2008년, 80세를 일기로 끝내 타계했다.

어머니의 기다림은 할머니가 이어받았다. “어머니가 늘 그러셨거든. 아버지가 북쪽에 잡혀있을거라고. 그래서 못 돌아오는 거라고. 아버지가 혹시 돌아올지 몰라서 이사도 안갔어. 어머니가 재혼도 안하고 혼자 나 키우면서 정말 고생 많으셨지.”

이규목씨가 운영하던 대장간 자리에는 이제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지명도 시흥군에서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으로 바뀌었지만 할머니의 기다림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아버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야. 피난통에 옷가지와 양식만 싸갖고 나오느라 사진같은 건 챙길 겨를이 없었거든. 남원 외갓집에 갔더니 거기도 벌써 피난가고 아무도 없어서 부산으로 갔다 서울 수복됐다고 해서 돌아왔더니 대장간터만 남고 다 불탔지. 아버지를 추억할만한 게 아무것도 안남았지.”

할머니가 참전유공자 유가족으로 인정받는 것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두징병으로 갔으니 기록이 부실했겠지. 공식적으로 전사 기록도 없고. 그래서 그냥 단순 실종자로 분류되고 참전유공자로는 인정이 안됐어. 군대에서 아버지 봤다는 사람이 혹시 있을까 싶어서 군에다 수소문도 많이 했는데 소용이 없었어. 그런데 1992년인가 1993년인가 군에서 병적(兵籍)기록을 정리하다가 아버지 이름이 나온거야. 그래서 겨우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

할머니의 말대로 6.25 참전유공자 인정은 당시의 부실한 행정체계와 기록유실 등이 맞물려 함께 참전한 동료 보증인의 증언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그나마 같이 참전한 동료 보증인을 찾는 것도 ‘사막에서 바늘찾기’여서 이규목씨처럼 숨겨져 있던 기록이 나타나 참전유공자로 인정받는 사례는 ‘매우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한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군인과 비(非)군인을 합쳐 6.25 참전자는 대략 90만여명으로 추산되지만, 참전유공자로 등록된 인원은 작년 5월 기준 47만여명에 불과하다. 4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희옥 할머니는 이제 국방부의 유해발굴사업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 할머니는 “70년이 지났고 나도 이렇게 늙었는데 아버지가 살아있을 것이라곤 기대도 안해. 그래도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알고 싶어. 유해발굴사업 한다고 하길래 곧바로 유전자 등록을 했지. 혹시라도 유해발굴하다가 아버지 시신이 나오면 대조해봐야 하니까. 그런데 그것도 영 소식이 없네.” 마지막 한숨을 쉬는 할머니의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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