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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23세 때인 1956년에 쓴 ‘우상의 파괴’라는 글이 한국일보에 실리면서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중견 문인이었던 소설가 김동리, 시인 조향, 소설가 이무영을 각각 ‘미몽의 우상’ ‘사기사의 우상’ ‘우매의 우상’이라고 비판해 문단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문학평론가로 데뷔했다.
같은 해 잡지 ‘문학예술’에 ‘현대시의 환위와 한계’가 추천돼 정식으로 등단한 고인은 황순원, 염상섭, 서정주 등 문단의 거목들을 향해서도 ‘현대의 신라인들’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청년 이어령의 눈에는 기성 문단이 어려운 시절에 직무유기하는 한가한 문사들로 비쳤던 것이다. 이후에는 문화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문학이 사회 비판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경계해 순수·참여 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경기고 교사로 3년간 재직하고서 고인은 1960년 서울신문 논설위원이 된다. 이후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면서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활약했다.
고인은 60여 년간 수많은 저서 집필했다.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1963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에세이를 모은 것으로 ‘한국 문화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으로 고인은 ‘젊은이의 기수’ ‘언어의 마술사’로도 불리기도 했다. 단행본으로 1년 동안 국내에서 10만 부가 팔렸고, 해외에서도 번역본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또 다른 대표작인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 외무성 초청 동경대 비교문학과 교수(1981∼82년) 시절 집필했다. 일본어로 원고를 써낸 이 책은 한국인이 쓴 책으로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고인은 1988년 서울에서 열린 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괄 기획을 맡아 문화 기획자로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냉전 여파를 딛고 모든 진영이 참가하자 딱딱한 표어 대신 ‘벽을 넘어서’라는 구호를 만들었고, 개막식 최고 명장면으로 꼽히는 ‘굴렁쇠 소년’을 연출했다.
문화공보부를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하면서 1990년 출범한 문화부의 초대 장관을 맡아 이듬해 12월까지 재임하며 문화정책의 기틀도 마련했다. 관료가 아닌 문화예술인 장관으로서 문화부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관 재임 2년 동안 국립국어연구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전통공방촌 건립, 도서관 업무 이관 등 공약했던 ‘4대 기둥 사업’을 마무리하고 물러났다. 장관 시절 ‘갓길’이란 말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인은 2006년 ‘디지로그’(Digilog) 시대가 온다‘는 칼럼을 일간지에 연재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도 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또는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시대의 흐름을 표현한 이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오랜 세월 무신론자로 살았던 그는 일흔을 넘긴 나이에 기독교 신자가 된다. 미국에서 검사로 활동하다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된 딸 이민아 목사에게 닥친 암과 실명 위기, 손자의 질병 등을 겪으면서 세례를 받았다. 고인은 신앙을 고백한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를 펴내면서 “제가 처음 쓴 내면의 이야기입니다. 저의 약점, 슬픔을 고백한 일종의 일기장이라고 할까요”라고 말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2년 뒤 딸 이 목사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고인이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책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다. 화려한 이력과 직함을 뒤로하고 온전히 이야기꾼으로 남고자 세상에 보탤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2020년 2월 시리즈 첫 권인 ’너 어디에서 왔니‘를 출간했다. 또 지난달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 1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를 내놓는 등 생의 마지막까지 삶의 본질적인 물음에 답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1987년 별세 한 달여 전, 가톨릭 신부에게 물은 24가지 질문에 대해 고인이 자신의 관점으로 답한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