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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7> 비련(悲戀)의 정조(情調) ‘목포의 눈물’

[대중가요의 아리랑] <7> 비련(悲戀)의 정조(情調) ‘목포의 눈물’

기사승인 2022. 08. 2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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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목포의 눈물'만큼 오랜 세월 우리 한국인의 사랑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하는 노래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민요풍의 가락에 구슬픈 곡조를 지닌 '목포의 눈물'은 트로트의 전성시대를 개막한 기념비적인 노래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위안가였고, 해방 후 군사정권 시절에는 호남인의 응원가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호남인들의 향토가나 다름없는 노래였다. '목포의 눈물'은 가수 이난영의 절창이다. 그리고 목포와 호남의 정한(情恨)을 넘어 온겨레의 애창곡이 된 지 오래이다.

1935년 오케레코드사에서 나온 '목포의 눈물' 가사는 유행가 공모작이다. 조선일보와 오케레코드사가 향토색이 담긴 노래 보급을 위해 시행한 노랫말 공모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한 작품이다. 당선자는 목포의 문학청년 문일석. 그는 일제 수탈의 상징적 항구인 목포를 등장시켜 망국의 설움과 광복의 열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여기에 곡을 붙여 애절한 정조를 살린 사람은 작곡가 손목인이었다.

일본 유학파로 박시춘과 더불어 한국 트로트 음악의 초석을 다진 음악인이다. 손목인은 고복수를 위해 만든 '갈매기 항구'라는 노래의 가락에 이 가사를 실었다. 이렇게 노래를 완성한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이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을 발탁해 곡을 취입한 것이다. 이난영의 성음은 흐느끼는 듯 애처롭다. 비음이 스민 애절한 음색이 듣는 이의 가슴속에 쓰라린 파도를 일렁이게 한다.

그 애상과 비련의 정조가 민족의 비애를 대변한 것이다.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을 달래고 위무해 준 것이다. 그래서 '목포의 눈물'은 발매와 동시에 5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중의 애창곡이 되었다. 순회공연단 막간 가수 이난영은 대중가요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이난영은 가난하고 험난했던 자신의 삶을 노래로 승화시키며 '목포의 눈물'을 통해 겨레의 한과 설움을 토해냈다.

'목포의 눈물'은 탄생 과정에서도 진통을 겪었다. 2절 가사 '삼백년 원한 품은'이란 구절이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 하여 논란이 되자,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으로 바꿔 일제 검열관의 눈을 속였다. '삼백연 바람이 편안하게 분다'는 뜻이라고 둘러댄 것이었다. 하지만 노래는 자연스럽게 '삼백년 원한 품은'으로 들려,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민족사의 원한을 재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가사 공모와 검열 줄타기를 벌인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의 기획력은 일본 엔카 형식의 노래를 민족 저항가로 반전시키는 역설을 빚어냈다. 노래는 전반적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슬픈 정조를 드러내고 있지만 2절 가사를 통해 임은 연인을 넘어 조국임을 시사한다. '목포의 눈물'은 교묘한 상징기법으로 조국을 빼앗아간 일제에 대한 민중의 원한과 민족의 설움을 드러낸 것이다.

'목포의 눈물'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난영은 남인수와 더불어 한국 대중가요계에 트로트 전성시대를 열었던 불멸의 가인이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음악인 남편 김해송이 납북되면서 고달픈 말년을 보낸 불운한 예인이었다. 첫사랑 남인수와의 재회도 오래 가지 못한 채 여생을 쓸쓸히 마감했다. '목포의 눈물'은 스스로에게도 처연한 음색의 실루엣으로 짙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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