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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 시사상식] 미국 헌법 사전엔 ‘개정’ 없다…필요할 땐 개헌 대신 수정

[톡톡! 시사상식] 미국 헌법 사전엔 ‘개정’ 없다…필요할 땐 개헌 대신 수정

기사승인 2023. 05. 2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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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서 부채한도 협상하는 바이든과 매카시 美 하원의장
조 바이든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22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의장(공화당)과 만나 부채한도 증액 논의를 하고 있다. 이날 매카시는 협상이 생산적이었지만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사진=AP·연합
미국 연방정부의 부채한도 상향을 위한 백악관과 의회의 협상이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부채한도란 미국 정부가 각종 사회보장제도와 건강보험 등을 운영하기 위한 빚을 낼 수 있는 상한선을 말합니다. 만약 다음달 1일까지 부채한도 상향을 위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할 경우 공무원·군인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게 되는 등 채무불이행(디폴트)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 정부의 부채한도는 31조3814억 달러로, 지난 2021년 12월에 상향 조정됐습니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대책 등으로 재정확대 정책을 펼친 탓에 정부 부채는 이미 올해 1월 한도에 도달했습니다. 아직 협상 기간이 닷새가량 남아있는 만큼 극적인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현재 미 재무부에서는 부채한도 상향 협상이 불발될 것에 대비해 기관들에 대한 지불방식을 기존 '롤링 베이스(마감시한 없이 처리하는 방식)'에서 지불기한 전날 지불금 청구서를 제출하는 '일일 지급 시스템'으로 바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미국 정부의 디폴트 우려가 갈수록 높아지자 여당인 민주당에서는 상원의원들을 중심으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수정헌법 14조'를 발동해 의회의 승인 없이 부채한도를 즉각 상향해야 한다는 주장이 줄기차게 나오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은 "공화당과 합의해 부채한도를 올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지만,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의 벼랑끝 전술이 계속된다면 대통령은 대안을 찾아야 한다"며 수정헌법 14조 발동을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수정헌법 14조는 '연방정부의 모든 채무 이행은 준수돼야 한다'는 내용으로, 현재 미국의 일부 헌법학자들은 이 조항이 부채한도를 상향하지 않고 계속해서 빚을 낼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화당이 다수인 하원에서 부채한도 상향에 합의해주지 않더라도 수정헌법 14조에 근거한 대통령 권한으로 국채 발행 등을 통해 또다시 빚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이든 대통령도 최근 "난 (부채한도 상향 없이 추가로 빚을 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일부 헌법학자 의견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만 이런 견해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대통령이 수정헌법 14조 카드를 쉽사리 꺼내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수정헌법 14조를 발동하면 이의 적법 여부를 따지기 위한 소송이 제기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부채한도 상향을 위한 절차가 중단될 수 있어 결과적으로 디폴트가 현실화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여기에 바이든 행정부의 재정정책을 총괄하는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 역시 지난 11일 "수정헌법 14조 발동이 실행할 수 있는 전략인지 법적으로 의문"이라는 부정적 견해를 밝혀 실현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G7 재무장관회의 기자회견서 질문 받는 옐런 美 재무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이 지난 11일 일본 니가타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재무장관회의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 자리에서 옐런 장관은 수정헌법 14조 발동이 미국 정부의 채무불이행(디폴트)을 막기 위해 실행할 수 있는 전략인지 법적으로 의문이라고 밝혔다. /사진=로이터·연합
이처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수정헌법(United States Constitution)'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채택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부분의 국가들은 시대 변천이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헌법을 바꿀 필요가 있을 때 '개헌(헌법 개정)'을 합니다. 기존 조항을 완전히 삭제하고 바꾼 내용을 새롭게 표기하는 것이죠. 반면 미국은 기존 헌법 조항을 그대로 둔 채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를 전문용어로는 '증보(amendment)'라고 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수정헌법을 사용하는 국가가 미국 외에 대만밖에 없을 정도로 극히 드문 방식입니다.

미국 헌법은 1787년 9월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13개주 55명의 대표가 모여 제정했습니다. 당시 이들은 의회(상·하원) 구성 방식, 대통령과 부통령의 선출 방법과 자격, 주 정부와 연방정부의 관계 등 미 합중국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7개 조항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수정헌법 조항을 추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수정헌법 조항은 상·하원에서 각각 제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로 발의되고, 50개 주 중 4분의 3 이상의 주(38개)가 비준하면 추가됩니다.

이러한 조건에 따라 지금까지 제정된 수정헌법 조항은 총 27개입니다. 헌법 제정 후 4년만인 1791년 12월에 처음 추가된 수정헌법 1조는 '표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모든 주장을 청취하며 자유로이 판단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가졌다'는 문구는 자유의 나라 미국을 상징하는 최고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25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법원이 1968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주인공이었던 올리비아 핫세(71)가 영화사 파라마운트 픽처스를 상대로 낸 소송을 기각한 것도 바로 수정헌법 1조에 근거를 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올리비아 핫세가 소송을 건 이유는 영화에 등장하는 남주인공과의 베드신이 사전 고지 없이 나체로 촬영되는 등 영화사에 의해 '성 착취'를 당했다는 것인데 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이를 보도한 AFP 통신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 법원의 앨리슨 매켄지 판사는 결정문에서 올리비아 핫세가 주장한 문제의 장면이 아동 포르노에 해당하지 않으며,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1조에 따라 보호된다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수정헌법 1조는 외설물뿐만 아니라 개인의 의사표현, 언론 보도, 정치적 캠페인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보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수정헌법에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견이 표출될 수 있는 조항도 적지 않습니다. 우선 당장 정부 부채한도 상향과 관련해 언급되고 있는 수정헌법 14조만 해도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인 1866년 전쟁에서 패한 남부 동맹국가들이 연방이 부담한 부채를 회피하지 못하도록 헌법 규정을 통해 강제한 것이라 대통령이 의회 승인 없이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너무 많다는 지적입니다.

수정헌법에는 시대를 역행하는 불합리한 내용과 시민(갱 포함)들의 비협조로 폐기된 조항도 있습니다. 1919년 '음용 목적을 위해 미국의 모든 관할 지역에서 주류의 제조, 판매, 운송, 수출입이 금지된다'는 짤막한 문구로 제정된, 이른바 '금주법'이라 불리는 18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법으로 술을 금지하겠다는 황당한 발상의 금주법은 이를 폐지키로 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선거공약에 따라 1933년 12월 수정헌법 21조가 사상 처음으로 상·하원 의결을 모두 거쳐 통과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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