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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를 펼친다. 젊은 시절 그렇게 총명하고 재능 있던 크눌프는 왜 한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늘 떠나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는 학교도 중도에 포기하고, 일자리도 버린 게으름뱅이이고 불안정한 인물이다. 그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인간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다. 그는 시인이고 노래하는 사람이다. 그는 꽃과 나무,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 해와 하늘, 들꽃이 피어나는 시골길, 불꽃놀이, 소녀들을 사랑한다. 진정한 자유란 물질적, 물리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내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는 세상이 요구하는 틀 밖에서 진실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에 더 가치를 두었다. 그의 외적 방랑은 내면의 자유를 향한 여정이었다. 그는 정착하지 않는 삶, 성취가 없는 존재도 충분히 의미 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눌프는 가정도 직업도 목표도 없이 방랑하며 이 땅에 잠시 머물다가 떠났다. 그의 삶은 세속적인 '쓸모'라는 개념에서 보면 헛되고 허망하고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물질적 성취가 아닌, 감정과 분위기, 인간다움을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 가치를 드러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작은 기쁨, 진정한 대화, 진심 어린 위로와 공감, 인간적 여백을 선사하며 삶을 충만하게 했다. 그는 쓸모나 성공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존재 그 자체로 주변을 환하게 만들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무책임하고 헛된 삶을 살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짧았던 삶을 돌아보며 신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뜻을 따랐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살았고, 내 방식대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면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는 그의 삶을 높이 평가했다. "네 삶은 쓸모없지 않았다. 너는 사람들이 더 따뜻하게 살아가도록 해주었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는 '크게 노니는 삶', 즉 얽매이지 않는 존재의 자유를 말한다. 장자는 자유의 상징으로 거대한 새 '붕(鵬)'을 등장시킨다. 붕새는 남쪽 바다 남명(南冥)으로 날아간다. 그것은 아득히 먼 하늘로 치솟는다. 이와 대비되는 쏙독새는 붕새를 비웃는다. "우리가 공중을 날아올라도 겨우 나뭇가지까지인데, 붕새는 어디로 날아가려는가?" 장자는 작은 시야에 갇힌 존재와 큰 흐름을 따라가는 존재의 차이를 말한다. 붕새는 목적지보다는 여행 그 자체, 흐름 그 자체에 집중하는 존재다. 장자는 무용(無用)의 존재론적 가치를 역설한다. 크눌프는 장자의 노목(老木)처럼, 특별한 용도는 없지만, 주변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함을 주는 존재였다. 장자나 크눌프는 유용과 쓸모를 강요하는 사회적 가치 체계에 저항하며 쓸모없는 것의 존재론적 가치를 몸소 실천했다. 장자의 '소요유'나 헤세의 '크눌프'는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서는 것이다. 초연함이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소유와 상실, 그 위에 서서, 그 모두를 하나의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다. 죽음을 앞둔 크눌프의 고백이 가슴 깊이 스며든다. "나는 당신이 보낸 나그네였습니다. 나는 나그네로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조금이나마 기쁘게 하려 애썼습니다. 나는 세상을 아름답다고 느꼈고, 그걸 내 방식대로 전하려 했습니다."
크눌프는 병세가 나빠진 것을 의식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날, 그는 오래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침대 아래 놓여 있는 낡고 닳은 신발을 집어 올렸다. 그는 근심 어린 눈으로 신발을 바라보며 말한다. "아직은 시월이야, 눈이 올 때까진 견딜 수 있을 거야. 그 뒤에는 어차피 내 삶도 끝나 있을 텐데 뭐!" 이어서 나직이 중얼거린다. "어쩌면 이 신발이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지도 몰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진정한 방랑자는 병든 폐보다 신발과 발의 상태에 더 신경 쓴다. 이윽고 그는 고향에 다다른다. 크눌프는 해 저무는 눈 쌓인 언덕에서 선혈을 토하고 쓰러진다. 의식이 흐릿해질 때 신이 나타나 그에게 묻는다. "지금껏 네가 겪은 것, 그리고 지금 겪고 있는 것, 그 모두가 좋으냐?" "네, 좋습니다. 모두 받아들입니다." 자기 삶과 화해하며 남긴 마지막 말이다. 우리는 이따금 신발을 살펴보고 다시 끈을 묶으며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남은 생의 여정에서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시인·교육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