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강성학 칼럼] 짝퉁 히틀러,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비극적 운명

[강성학 칼럼] 짝퉁 히틀러,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비극적 운명

기사승인 2023. 08. 16. 17:00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나폴레옹 황제의 권력이 거의 절정에 올랐던 1808년 에르푸르트(Erfurt)회담에서 얼마 전 외무상직에서 해임된 텔러랑(Talleyrand)은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더 1세(Czar Alexander I)에게 "라인, 알프스, 피레네스는 프랑스의 정복이지만 나머지는 황제 나폴레옹의 정복이다. 그것들은 프랑스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비밀리에 말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정복계획은 21세기 러시아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푸틴 대통령의 정복 야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21세기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서방세계에서 20세기 독일의 히틀러와 자주 비교되어 이제는 "푸틀러(Putler)"라고 불리기도 한다. 2022년 2월 24일 푸틴의 특수 군사작전명에 따라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우크라이나가 반격함으로써 시작된 우-러 간의 전쟁이 결정적 전투 없이 지루한 소모전 양상을 띠고 있다. 게다가 푸틴은 자기의 피그말리언(Pygmalion)인 용병집단 바그너 그룹이 프랑켄슈타인 괴물로 변하자 내우외환에 직면했다. 그의 역사적 교육은 참으로 엉성해 보인다. 

독일의 히틀러가 1936년 3월 17일 당시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비무장지대 라인란트(Rheinland)를 슬그머니 점령하고 프랑스와 영국이 이에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자 4월 14일 벨기에는 중립국으로 복귀를 선언했다. 그 결과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로 가는 군사적 통행로를 상실해 버렸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가 1938년 3월 12일 독일군으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의 국경선을 넘어 수도 빈으로 행군하게 하고 그곳에서 오스트리아인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을 때에도 영국과 프랑스로 대변되는 유럽은 또다시 침묵했다.

푸틴도 2014년 러시아의 과거 전략적 요충지인 크림반도를 슬그머니 점령했을 때 우크라이나와 유럽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이 성공적 행동으로 고무된 푸틴은 2022년 2월 24일 전격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그는 아마도 히틀러가 받았던 오스트리아인들의 열렬한 환영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우크라이나인들의 피동적 굴복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판단의 실수를 저질렀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인종적으로 독일인들이었기에 민족자결의 원칙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처럼 푸틴도 우크라이나인들이 같은 슬라브족이었기에 열렬한 환영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묵시적 굴복은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은 오스트리아인들과는 달리 러시아의 수백 년에 걸친 압제로 고통받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참혹한 탄압과 약탈을 당했던 트라우마로 인해서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길 오랫동안 염원했다. 그들은 서방세계에 합류하길 원했다. 따라서 히틀러의 오스트리아와 푸틴의 우크라이나는 판이한 역사적 경험과 현실적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푸틴은 국제정치적 및 군사적으로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우선 국제정치적으로,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이미 독일 나치스정당의 자매정당인 오스트리아의 나치스정당이 정치적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의 나치들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수상인 쿠르트 폰 슈슈니크(Kurt von Schuschnigg) 수상에게 나치들을 내각에 합류시키도록 강요했다. 3월에 슈슈니크 수상은 오스트리아인들이 자유와 독립을 원하는지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의 실시를 발표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만일 슈슈니크가 국민투표를 실시하면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위협에 직면한 슈슈니크는 국민투표를 연기하고 수상직을 사임했다. 그러자 나치스 정당의 지도자 아르투르 세이스-인콰르트(Arthur Seyss-Inquart)가 정부를 장악하고 히틀러의 종용을 받아 평화보존을 돕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독일병력을 초대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인들이 같은 독일민족으로 그 당시 당연시되던 민족자결의 원칙을 내세워 오스트리아의 합병(Anschluss)을 정당화했다. 3월 13일 세스-인콰르트가 오스트리아는 이제 독일 제3제국의 일개 지방이라고 발표했다. 3일 후에 히틀러는 자기가 태어났던 오스트리아에서 벤츠 자동차를 타고 빈에 들어갔다. 군중들은 그를 열렬한 환호로 맞이했다. 한 달 후에 이제 독일인이 된 오스트리아인들이 합병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투표권자의 99%가 찬성표를 던졌다. 그때까지는 이미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히틀러는 치밀한 정치적 공작으로 사실상 오스트리아 무혈입성에 성공했다. 

러시아의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열세를 알고 러시아의 막강한 무력으로 3일 만에 우크라이나를 점령할 수 있다는 허장성세를 부렸다. 그것은 히틀러의 군사전략적 행동과 판이한 차이를 보였다. 히틀러는 1940년 5월 10일 1800대의 탱크와 3만대의 차량으로 윈스턴 처칠이 수상으로 임명되던 바로 그날 독일군으로 하여금 남부 벨기에의 아르덴(Ardennes)을 통과하는 전격작전(Blitzkrieg)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프랑스가 대독일 공세를 위해 남겨둔 마지노선(the Maginot Line)의 공백을 이용하여 전격 기습을 단행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거의 한 달 만인 6월 14일에 독일군에 함락되고 6월 21일 프랑스정부는 항복했다. 반면에 푸틴은 총 20만 병력을 동원하여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기습작전을 벌였지만 우크라이나의 제1차적 중력의 중심부(the center gravity)인 수도 키이우를 점령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그의 양면전쟁은 어느 곳에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푸틴은 중대한 집중의 군사전략적 원칙을 위반했다. (보다 상세한 군사전략적 평가는 필자의 2022년 10월 6일자 본지 칼럼, "거인 러시아는 왜 소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지고 있나?" 참조). 게다가 히틀러와 달리 푸틴은 러시아군 '지휘통일(the unity of command)'의 원칙을 확립하지 못한 채 국내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러시아의 승전 가능성은 갈수록 낮아 보인다. 그는 히틀러의 전쟁지도자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히틀러의 짝퉁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 저급한 스파이 활동의 경험밖에 없는 푸틴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열한 침략행위는 예상치 못한 우크라이나의 필사적 저항은 물론이고 미국을 비롯해 유럽 거의 모든 국가들의 규탄과 그 국가들의 우크라이나의 지원에 직면했다. 또한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이 있지만 중앙정부에 영향을 미칠 만큼 강력한 친-러시아 정당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2014년 크림반도의 무혈 합병의 성공에 취해 그 사건 이후 무방비 상태로 당했던 우크라이나와 미국이 갖게 된 경각심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수세기에 걸쳐 진행되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에 의해서 정점을 이루었던 소위 러시아의 영향권(the sphere of influence) 확보는 오늘의 국제사회에서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2022년 2월 4일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자국이 서명한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한 유엔헌장과 그리고 민주주의, 평화 그리고 단결을 위한 파리헌장을 정면 위반함으로써 러시아는 이제 용납될 수 없는 침략국가가 되어버렸으며 푸틴 대통령 자신은 국제적으로 전범자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국제정치의 원리와 군사전략적으로 무지한 '푸틀러'같은 지도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군사적 패전으로 자기 나라는 물론 자기 자신을 망치는 법이다. 푸틴은 레닌이 숙독했던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Vom Kriege)을 읽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