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는 '국부론'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도덕감정론'에서 입법자들에게 '체스판의 졸' 오류를 이렇게 경계했다.
"정치가들은, 자신이 체스판의 졸들을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것처럼, 거대한 사회의 서로 다른 구성원들을 마음먹은 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같다. … 체스판의 졸들은 그의 손이 체스판의 졸들에 부여하는 움직임 이외에는 전혀 자신의 운동의 원리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사회라는 체스판에서는, 체스판의 모든 말들이―입법자들이 그 말들에게 부과하고자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각자의 움직임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VI. II. 42)
스미스의 이런 훌륭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이런 '체스판의 졸' 오류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곳곳에서 넘쳐나고 있다. 그 고전적 사례는 1696년에 도입된 영국의 창문세(窓門稅)이다. 창문의 수는 부의 크기를 잘 대변한다고 보고 정부는 창문의 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런데 창문세가 도입되자 사람들은 아예 창문을 없애기 시작했다. 햇볕이 들지 않는 음산한 건축물들이 역사적 유물로 아직 남아 있는데 이 건물들은 '체스판의 졸' 오류, 즉 사람들의 반응을 간과한 오류의 상징인 셈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일부 사람들은 주식 부자들에게 소득을 늘려주어 보았자 그들은 소비를 늘리지 않을 것이므로, 최저임금 인상 등의 정책을 통해 저소득층의 소득을 인상시켜 내수를 진작시키자고 주장한다. 이 주장도 이런 '체스판의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저임금을 올려도 고용주들이 체스판의 말들처럼 종전의 고용 수준을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조건들에 변함이 없다면, 어떤 재화의 가격이 오르면 사람들은 그 재화에 대한 수요를 줄인다. 고용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의 가격이 오르면 수요를 줄이는 반응을 한다.
'체스판의 졸' 오류에 빠지게 되면 그 어떤 경제정책도 성공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기업가들의 투자를 통한 내수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새경제팀은 특히 이 '체스판 졸' 오류가 주는 교훈을 잘 음미할 필요가 있다. 기업가는 스스로의 행동원리를 가진, 가장 수동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정책가들은 이 기업가들이 자신들이 펼치는 정책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기업가 입장이 되어 검토해야 한다.
만약 기업가들의 반응이 원하는 방향과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면, 그 정책을 폐기하거나 무력화시키고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물론 이는 기존 기업들이 환영하는 정책이라면 무조건 실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진입규제는 기존 기업들이 반기겠지만 애덤 스미스는 결사반대했을 것이다.) 이것이 애덤 스미스가 '스스로 행동 원리를 지닌 무수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한국경제라는 체스판'을 마주한 새 경제팀에 주는 정책 훈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