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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산업계를 출입하면서 만났던 임원들에게 자주 했었던 질문입니다. 질문을 받은 기업 임원들의 답변은 다양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많이 거론됐었던 주제 중 하나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중 대기업들의 몰락, 또 다른 하나는 한국 산업계를 이끈 거인(巨人)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한국 경제를 이끈 거인들…이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이 예상했듯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건희 삼성 회장입니다. 그 두 명을 언급하면서 가장 많이 나왔던 사례는 바로 ‘500원 짜리 거북선 지폐 하나로 일군 선박 수주’(정주영 회장)와 ‘마누라랑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고 일갈했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건희 회장)입니다.
시간을 1970년대 초반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사업, 중동진출 등 진출하는 사업마다 성공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웁니다. 하지만 현대그룹이 더 크기 위해선 미래의 유망사업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 조선 산업에 무작정 뛰어들게 됩니다. 관련 산업의 경험과 뒤를 받혀줄 자본도 없는 상태에서요...
막상 뛰어들고 보니 역시나 돈이 문제였습니다. 조선 산업은 지금까지 그가 경험해보지 못한 막대한 금액이 있어야 간신히 발 정도만 담글 수 있는 분야였습니다. 외자를 확보해야 했지만 배를 만들어본 적도 없는 회사에 조선소 건립에 필요한 금융을 지원할 기관도, 선박을 주문할 선주도 전무했던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이에 정 회장은 영국 은행의 차관을 도입하는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해줄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찾아갑니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기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재계, 아니 우리나라 역사가 바뀔 명장면이 탄생하게 됩니다.
차관 제공에 난색을 표하던 롱바텀 회장에게 정 회장은 500원짜리 1장을 꺼내서 지폐에 그려진 거 거북선을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한국은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 이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것이다. 현재 한국은 산업화가 늦어져서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조만간 잠재력이 나타날 것이다.”
결국 정 회장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조선소를 지을 자금과 선박까지 수주하는 전무후무한 일을 해내게 됩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도, 상상 할 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을 추진, 결국 성공함으로써 우리 조선업계가 세계 1위를 할 수 있었던 기틀을 닦아 놓습니다.
우리나라 수출을 지탱하고 세계조선업계를 좌지우지 했던 조선 빅3(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가 지난해 사상 최고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한때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다”고 자부했던 조선업계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씁쓸한 결과입니다. 이미 각 업체 내부에서는 “조선업은 사양 산업”, “글로벌 경기 불황, 신흥국의 저가공세로 한국 조선업이 설 땅을 없어질 것” 등의 자조석인 반응도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엄청난 자부심을 가졌던 그들이 얼마나 거대한 절망을 겪었을지는 대충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쉽사리 말 붙이기도 힘들 정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 조선업계에 감히 묻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하는게 어려울까요? 아니면 지금 위기를 ‘한때의 사건’ 치부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어려울까요?
물론 우리 조선업계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정든 직장에서 떠나야만하고, 과거에 경험했던 혜택은 다시는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본업이라 생각했던 “배 만드는 일”대신 다른 일, 다른 기술을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겪지 않는다면 우리 조선업계의 부활은 멋 훗날의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맨땅에 헤딩할 무모함으로 세계 조선 사업에 도전했던 선배들의 정신만큼은 온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산업의 기둥이었던 조선업의 부활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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