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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항일 운동가’ 김옥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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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윤 기자

승인 : 2017. 12. 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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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단_김옥련_기사용이미지 (1)
/ 제공=한국해양재단
김옥련은 1932년 1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제주 해녀 항일투쟁의 주역이다.

당시 수천 명의 제주 해녀들이 일제의 수탈과 압제에 맞서 전복을 딸 때 쓰는 쇠 갈고리인 ‘빗창’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녀들의 항쟁은 3개월 간이나 지속됐다. 참여 인원은 연 1만7000여명이었다.

24일 한국해양재단·해양수신부에 따르면 김옥련은 국민에게 본보기가 될 16번째 ‘이달의 해양역사인물’이다.

김옥련은 당시 제주도 여성들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아홉 살이 되던 해부터 바다 속을 드나들며 물질을 했다. 그녀의 부모는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그녀를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김옥련은 야학에라도 나가 공부를 하려했지만 이마저도 부모의 반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 몰래 울타리를 넘어 야학에 나갔다가 부모에게 들켜서 모질게 매를 맞기도 했다.

야학에서는 주로 노동독본·산술·글쓰기 등을 배웠는데, 그것은 훗날 그녀가 일제의 부당한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녀는 야학교사 오문규·김순종 등의 지도 아래 또래 소녀들과 함께 ‘소녀회’에서 활동하며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일제 강점기 제주 해녀들은 일본인 자본가들의 횡포와 수탈에 시달렸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총독부로부터 독점권을 얻어서 해녀들이 목숨 걸고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감태·전복들을 헐값에 사들였다.

특히 그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전복 값을 절반으로 깎아 내리거나 아예 사주지도 않았다.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날에 전복이 2~3배나 더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제주 해녀들은 일본인들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조합을 조직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해녀조합은 어용단체가 되어 오히려 해녀들을 더 억압했다.

이에 김옥련을 비롯한 해녀들은 해녀조합에 맞서 ‘해녀회’를 조직했다. 그러던 차에 1931년 중반 즈음에 사건이 터졌다. 당시 해녀조합은 제주 하도리 해녀들이 바다에서 따 온 감태·전복의 가격을 강제로 싸게 매기려 했다.

분노한 해녀들이 강하게 항의하자 해녀 조합은 어쩔 수 없이 정상적인 매입을 약속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약속을 실행하지 않았다. 마침내 하도리의 해녀들은 해녀조합의 횡포와 무성의에 반발해 집단 투쟁에 나섰다.

1931년 12월 20일 김옥련을 비롯한 제주 하도리 해녀들은 오문규의 지도 아래 12개의 투쟁 조항을 마련하고 행동에 나섰다. 이듬해 1월 7일 김옥련과 해녀들은 세화 장날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녀들이 해녀조합의 부조리를 규탄하자 그에 공감하는 해녀들이 합세하면서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 시위 행렬이 구좌면 사무소에 이르자 면장이 직접 그녀들을 만나 자신이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해녀들은 면장의 말을 믿고 일단 해산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구좌면장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해녀 시위대는 1월 12일 새로 부임한 제주도사 겸 제주도 해녀조합장인 다구치가 구좌면을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세화장터로 몰려갔다.

해녀 100여명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다구치가 탄 차를 에워쌌다. 김옥련은 도사의 차 위에 올라서서 12가지 요구사항을 조목조목 따졌다. 부춘화는 담장에 올라서 결의문을 낭독했다.

시위대의 험악한 기세에 눌린 다구치는 5일 안에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요구조항이 실행되지 않자 해녀들은 또다시 시위에 나섰다.

그러자 제주도사는 무장 경관대를 출동시켜 주동인물들을 잡아들였다. 이로 인해 34명의 해녀 주동자들과 청년 수십여명이 강제로 연행되었다.

우도 해녀들이 주동자를 체포하러 온 일본 경찰에 맞서 항의를 벌였으나 강제 해산되었다. 김옥련은 제주 해녀 운동의 주동자로 몰려서 결국 6개월 간의 옥살이를 했다.

한국해양재단은 “제주 해녀 항일운동은 하층민으로 인식되어 온 해녀들이 주도한 항일 투쟁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며 “그 중심에는 야학을 통해 민족정신을 함양한 김옥련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해양재단카드뉴스_김옥련3
/ 제공=한국해양재단

강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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