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틀 벗어나 미래 먹거리 발굴 필요
8년간 멈췄던 인수합병 재개 목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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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삼성전자는 매출 300조원을 달성했다. 2022년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이 기간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400% 가까이 늘었다. 반도체 빙하기였던 2023년의 기저효과이지만, 글로벌 경기침체 장기화 우려 속에서 선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초체력'은 과거에 비해 확 떨어졌다. 거의 모든 사업 분야에서 '옛 명성'을 잃어가는 분위기다. 허약해진 체력을 보충할 기회가 있었지만, 사법리스크에 발목이 잡힌 탓에 속절없이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3일 2심 무죄 판결로 이 회장은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았다.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을 능가하는 성과를 이뤄보겠다고 다짐했던 이재용 회장의 '승어부(勝於父)'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기회다. 삼성 관계자는 "2심 무죄판결로 이제 사법리스크 핑계를 댈 수도 없다"며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말했다.
◇ 허약해진 기초체력
이 회장의 최우선 당면과제는 '불확실성 극복'이다. 지난해 선방 수준의 실적을 올렸음에도 주가가 맥을 못 추는 것도 삼성의 미래를 우려하는 시장의 냉정한 평가가 있다. 삼성전자 주가는 지난해 7월 8만8800원을 찍은 이후 줄곧 우하향 곡선을 그리는 중이다. 5만원 선마저 위협받는 모양새다. 삼성의 미래 불확실성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비메모리 등 신성장 사업 진출의 더딘 속도는 물론, 메모리 반도체·디스플레이·스마트폰 등 당초 선두에서 달리던 사업들마저 최고 경쟁력을 유지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형국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 1위를 향해 추월해야 할 목표가 명확한 사업마저 정체돼 있는 상황이다. 1조원 이상의 굵직한 M&A(인수합병)는 사법 족쇄가 묶이기 전인 2016년 이후 최근 8년간 한 건도 없다.
삼성전자는 대만 TSMC가 파운드리 사업에서,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서, 샤오미·화웨이·비보 등 중국 업체들이 스마트폰 사업에서 치고 나가는 걸 눈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이 회장이 사법족쇄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삼성전자 주요 사업 경쟁력은 저하돼 왔다. 2016년 4분기 9조2200억원에 달하던 전사 영업이익은 지난해 4분기 6조5000억원으로 줄었다. 1위를 달리던 D램 점유율은 64.5%에서 41.1%로 추락했다. 파운드리도 추격은커녕 오히려 반토막 났다.
◇ "익숙함을 벗어던져라"
주력 사업 경쟁력이 약화되는 것과 동시에 삼성의 큰 고민은 '미래 먹거리' 부재(不在)다. '반도체-스마트폰-TV·가전-디스플레이' 등 현재 삼성전자의 주력사업은 모두 이건희 시대에 형성된 것들이다.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200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이재용 시대에서도 하만(자동차 전장)이 추가되었을 뿐, 큰 틀에서 새로운 먹거리는 발굴하지 못한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이재용 회장이 그릴 뉴삼성, 삼성 3.0의 시작은 아버지 시대의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사법 족쇄로 인해 좌고우면했던 M&A를 재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삼성 안팎에서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존의 반도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를 이을 로봇, 우주항공, AI 등 새 먹거리를 채워 넣을 방법은 현재로선 M&A뿐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 결정을 할 수 있는 건 이 회장뿐이다. 실제로 지난해 삼성은 글로벌 반도체 설계회사 인수를 추진했으나 막판에 포기했다. 인수가가 높았던 탓도 있지만, 미래 먹거리 여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을 못 내린 게 인수 포기의 결정적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산업계 관계자는 "그간 금기시해왔던 전기차 등 친환경 자동차 산업이나 50년 뒤를 내다본 우주 산업 등 상상력을 옥죄는 한계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며 "이재용 회장의 진정한 '승어부'는 아버지 시대의 유산을 뛰어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