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이 최근 세계 초연한 오페라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은 물시계를 다루는 시계 장인과 물에 깃들어 사는 정령의 대립을 그린다. 예술의전당은 이 작품을 "K-오페라의 지평을 열겠다"는 각오로 제작했다고 밝혔다. 대중문화에서 촉발된 한류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이때 우리 오페라 또한 'K-'의 물결에 동참하겠다는 취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오페라를 작품성과 K-오페라의 가능성 등 두 가지의 측면으로 살펴봤다.
먼저 작품성에서, 아르떼뮤지엄의 미디어아트 등을 동반한 시각적 효과도 뛰어났고, 음악적 수준도 상당히 높은 오페라였다. 호주 작곡가인 메리 핀스터러는 음악극 형태에 가까운 오페라를 선보였다. 주요 아리아를 찾아볼 수 없고 음악적으로 기승전결이 모호한 구성을 가진 핀스터러의 음악은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 오페라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크 시대의 영국 오페라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어로 된 대사 때문인지 낭송 조의 노래는 헨리 퍼셀의 '앤썸(anthems)'을 연상케 했다. 성악부에 의도적으로 패시지(경과구)를 삽입한 것이라든가 성별이 드러나지 않은 시계 장인을 메조소프라노로 설정해 소프라노와 투톱으로 작품을 이끌어간 것 또한 바로크 오페라를 떠올리게 했다. 아시아의 이야기를 담은 미래지향적 현대작이 오히려 초기 오페라의 원형에 가깝다는 역설이 흥미로웠다. 이를 영국 바로크 오페라의 21세기적인 재현으로 해석하고 싶다.
신작 오페라 물의 정령 (예술의전당 제공)(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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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물의 정령'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일반 관념에서 벗어난 것은 이뿐 아니다. 그간 오페라에 등장하는 물의 정령은 대개 세이렌이나 운디네, 루살카와 같이 인간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여성 형상이었다. 그러나 호주 극작가 톰 라이트가 영어 대본을 맡은 이번 오페라에서는 공주의 몸에 깃든 악령으로, 기후변화와 자연재해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아마도 정령이 아닌 한국 고유의 물귀신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 우리 물귀신은 주로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존재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온전한 화성에 기반한 핀스터러의 음악은 듣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했는데, 성악보다 기악의 존재감이 더 컸다. 이 또한 낭만주의 오페라에 익숙한 객석에는 낯설게 다가왔지만, 물결의 끊임없이 일렁임과 물살의 요동이 관현악을 통해 유려하게 전해졌다. 스티븐 오즈굿이 이끄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력이 탄탄하게 뒷받침한 덕분일 것이다. 인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구원의 서사는 오페라의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이지만 잔잔하다 못해 느슨했던 1막에서 등장인물 간 관계 형성이 좀 더 구체적이었다면, 지나치게 박진감 넘쳤던 2막의 전개가 보다 개연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신작 오페라 물의 정령 (예술의전당 제공)(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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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물의 정령'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이날 시계 장인 역할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김정미와 공주 역의 소프라노 황수미를 비롯해 우리 성악가들은 영어로 된 가사와 쉽지 않은 연기를 모두 훌륭하게 소화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두 주연 외에도 베이스 김동호 등 조역으로 출연한 우리 신예 성악가들도 주어진 역할을 인상적으로 해냈다.
K-오페라로서의 가능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아직 미지수라고 하겠다. 작품에서 한국적인 요소를 직관적으로 찾기 어렵거나 영어로 된 대본 때문만은 아니다. 2막, 공주가 노래하는 자장가에서 우리 아리랑의 주요 음정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상징적이었던 거문고의 활용 또한 한국적인 것에 대한 강박을 피하고자 했던 제작진의 의도로 받아들였다. 오페라에서 언어의 독자성은 중요한 문제지만 세계무대 진출을 목표로 한다면 유연한 현지화 전략으로 볼 수도 있다. 라이선스 뮤지컬처럼 훗날, 한국어 번역본을 추가해 공연해도 좋을 것이다.
신작 오페라 물의 정령 (예술의전당 제공)(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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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물의 정령'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문제는 오리엔탈리즘이 강하게 드러나는 프로덕션이다. 색채나 무대의 질감 등등 여러 가지로 서구인들이 현대 아시아 오페라에 기대하는 요소가 충실히 표현된 이번 프로덕션만으로 앞으로의 지속가능성을 판단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이 프로덕션이 아닌 새로운 무대와 연출로 다시 공연될 때, K- 오페라로서 이 오페라의 생명력과 가능성은 비로소 시작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