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58번국도와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공동 제작
동거와 관계, 가족의 바깥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여백을 무대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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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배경은 평범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일러스트 디자이너 나츠는 동거 중인 연인 유우코와 조용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유우코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인해 그녀의 어머니 하츠에가 병원을 오가게 되고, 당분간 나츠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연인의 어머니와의 낯선 동거는 예상 밖의 긴장과 미묘한 거리감을 만들어내고, 나츠의 전 애인 유우미까지 예고 없이 등장하면서 세 인물의 과거와 현재, 얽힌 감정이 한 공간 안에서 복잡하게 뒤엉킨다.
'타인'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거리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거리감이 때로는 위로의 온기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유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이름 없는 관계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 애매함 속에서 피어나는 공감의 순간에 집중한다. 비혼, 동거, 젠더, 가족, 책임과 같은 현대 사회의 복합적인 주제들을 과도한 설명 없이 삶의 한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꺼내 보인다.
작품의 원작자 다케다 모모코는 일본 고치현 출신으로, 고향 방언인 하타벤을 활용한 창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인간 군상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유쾌하면서도 진중하게 녹여내는 필력을 지녔으며, '타인'으로 2022년 일본 '희곡상' 최우수작을 수상했다. 평범한 일상의 어긋남에서 비롯되는 관계의 변화, 예기치 못한 공감과 공존의 가능성을 섬세한 대사와 장면으로 엮어내며, 말보다 중요한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인물의 숨결을 깊이 있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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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극단은 '비와 고양이와 몇 개의 거짓말' '오징어 지우개' '접수' 등 내부 단원들이 직접 연출한 무대뿐 아니라 '해녀 연심'과 같은 낭독 공연, 쇼케이스, 워크숍 등을 통해 동아시아 현대희곡의 교차점을 지속적으로 탐색해왔다.
이번 연출을 맡은 나옥희는 '고수희'라는 이름으로 배우 활동을 병행해온 인물로, 극단 58번국도의 주요 작품에서는 번역자로도 활약해왔다. 이번 '타인'에서는 번역이 아닌 연출에 집중해 섬세한 연극적 해석을 무대 위에 구현해낸다.
1999년 연극 '청춘예찬'으로 데뷔한 그는 '야키니쿠 드래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풍찬노숙' 등 다양한 무대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이며 배우로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과정에서 동아연극상 연기상과 일본 요미우리연극상 여자우수연기상 등을 수상했고, 이후 현실을 꿰뚫는 시선과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연출가로서의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이번 무대는 그가 관객과 배우 사이의 온도차를 세심하게 조율하며 균형 잡힌 호흡을 이끌어낼 또 하나의 시도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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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타인'은 특정한 가족 구조나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부모도, 자식도, 연인도 아닌 사람들이 우연히 한 공간에 머무르며 식탁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감정과 말들 속에서, 관객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관계의 가능성과 마주하게 된다. 서로의 상처와 비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지만, 그 머뭇거림 속에서 진심에 가까운 순간이 피어날지도 모른다. 작품은 그러한 여백과 조율을 통해, 타인이 단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위로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일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암시한다.
국적과 언어, 세대와 성별의 차이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정서적 고립과 관계의 불확실성을 섬세하게 비추는 이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따뜻한 제안이자 질문이 될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타인인가? 그리고 그 타인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삶에 스며들 수 있을까? 작품은 이 질문에 쉽게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각자의 자리에서 곱씹을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이번 공연은 한일 간 문화 교류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단순히 언어와 지역을 넘는 협업을 넘어 감정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고자 하는 진심 어린 시도이기도 하다. 관객은 무대 위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와는 다른 누군가의 삶이 어쩌면 나의 이야기로 다가올 수도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연극 '타인'은 그렇게 조용히 다가와, 각자의 내면에 잔잔한 울림을 남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