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성의 교차된 감정선이 빚어내는 섬세한 공감
정의할 수 없는 사이, 그러나 확실하게 스며드는 위로의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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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한 사람의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나츠와 함께 살던 연인 유우코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자, 이 소식을 접한 어머니 하츠에는 병문안을 위해 도쿄로 올라온다. 유우코의 부재 속에서 하츠에는 나츠의 집에 머무르게 되고, 마주 앉기엔 어딘가 어색한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된다. 여기에 나츠의 옛 연인 유우미까지 예고 없이 찾아오면서, 무대는 세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따라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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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츠에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만 관계가 정당화된다고 믿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법적 구속력도 명확한 호칭도 없는 두 사람의 관계는 낯설고 혼란스럽다. 반면 나츠는 결혼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은 삶의 방식도 의미 있을 수 있다고 믿으며, 조심스럽지만 단단한 태도로 자신의 입장을 전한다. 이들의 충돌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세대와 세계관, 제도와 감정이 맞부딪히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긴장이다. 그 안에는 '사랑의 방식'과 그 선택의 자유가 과연 누구에게 허락되는지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 깔려 있다.
서로를 전혀 몰랐던 두 여성이 나누는 대화는, 세대와 경험의 차이를 넘어서는 감정의 여백을 만들어낸다. 삶에 대한 조심스러운 고백, 관계의 불안정함, 혼자 남겨진 감정들이 오가며, '타인'이라 불렸던 존재들 사이에 느릿하지만 확실한 공감의 온도가 서서히 스며든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는 침묵의 순간들은 이 장면의 감정적 진폭을 한층 깊게 만든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의견 충돌이나 세대 간의 오해를 넘어, '누구의 삶이 더 정상적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조용히 되살린다. 제도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랑,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관계를 향한 사회의 시선을 드러내며, 여전히 유효한 감정의 균열을 관객 앞에 환기시킨다. 그것은 결국, 제도 밖의 존재들이 스스로 자신의 감정과 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조용한 고발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면들이 강한 감정의 고조 없이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덕분이다. 나츠 역의 정예지는 복잡한 내면을 절제된 표현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냈고, 유우미 역의 박지원은 감정의 유연함과 방어기제를 섬세하게 오가며 극의 밀도를 높였다. 하츠에 역의 장연익은 낯선 관계를 마주한 중년 여성의 혼란과 거리감을 생생하게 표현하며, 인물의 변화와 감정의 결을 정교하게 구축해냈다. 특히 무심한 듯 던지는 말들 사이로 스며드는 단절감과 고독, 그리고 점차 드러나는 수용의 태도는 관객의 마음을 천천히 흔든다. 침묵과 시선, 망설임의 리듬까지도 극 속의 서사로 끌어들이는 장연익의 연기는 극의 정서적 중심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
또한 유우코라는 부재의 인물은 무대에 등장하지 않지만, 세 인물의 언어와 기억 속에 뚜렷하게 존재하며 서사의 중심에 머문다. 이 '보이지 않는 연인'의 존재는 오히려 더 진하고 선명한 감정의 무게를 부여한다. 모든 인물이 그녀를 향해 다르게 반응하고 기억하며, 결국 그 부재는 이 관계들의 본질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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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타인인가?"라는 물음은 "우리는 서로의 삶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함께할 수 있는가?"로 확장된다. 이 물음은 퀴어 커플을 넘어, 모든 인간 관계에 통용된다. 이 작품은 퀴어의 삶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정체성, 가족, 사랑의 균열을 함께 비춘다. 그렇기에 이 연극은 조용하지만 깊고 단단한 울림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마음속에 무언가가 오래 맴돈다. 그것은 사랑의 정의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고, 가족이라는 구조가 강요하는 역할에 대한 회의일 수도 있다. 혹은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연극 '타인'은 그 감정들을 관객의 마음에 조용히 심어두고 퇴장한다. 그 조용함은 어쩌면, 가장 큰 울림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번 무대는 단순한 해외 희곡 번역을 넘어선, 깊이 있는 문화교류의 성과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극작가 다케다 모모코의 섬세한 필치는 한국 배우들의 깊이 있는 해석과 연출을 통해 또 다른 결을 만들어냈다. 낯선 언어와 정서가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양국의 문화가 감정의 층위에서 조응하는 순간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번 작품은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와 극단 58번국도의 공동 제작으로 이루어졌으며, 서울문화재단의 메세나 지원사업 선정작이자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하는 공식 문화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랐다. 특히 '차세대 일본희곡번역가 발굴 프로그램'을 통해 번역된 이 작품은, 단순한 공연을 넘어 창작자와 번역가, 관객 사이의 감정과 감각이 교차하는 '공감의 플랫폼'이자 예술이 이룩할 수 있는 교류의 이상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타인'은 단순한 해외 희곡의 번역 공연을 넘어, 연극이라는 형식이 지닌 가능성과 감정의 보편성을 깊이 있게 탐색한 수작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누구나 타인이 되는 시대, 그 타인과 조심스레 관계 맺는 과정을 이토록 섬세하고도 품위 있게 풀어낸 무대는 흔치 않다. 연출은 과장을 철저히 배제하고, 일상의 리듬을 그대로 가져오되 결코 지루하지 않은 밀도 높은 긴장감을 유지했다. 배우들의 연기는 서사의 결을 따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내면의 떨림을 놓치지 않는 집중력을 보여줬다.
결국 '타인'은 번역극이라는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어, 오히려 그 지점을 통해 언어와 정서, 문화적 코드의 간극을 정교하게 조율한 작품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마음속에 남는 여운은, 바로 그 정밀하게 구축된 감정의 설계도에서 비롯된다. 한일 문화교류의 성과로서도, 독립된 창작의 완성도로서도 손색없는 이번 무대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연극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증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