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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짜 일·가정 양립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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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7. 16. 17:06

유혜정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 인구연구센터장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 유혜정 센터장 사진
유혜정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 인구연구센터장
올해부터 상장기업들의 사업보고서에 육아휴직과 임신·육아기 단축근무 사용률 공시가 의무화됐다. 정부의 저출생 대응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변화다. 제도 확산을 위해 이러한 의무화 조치는 분명한 의의를 지니고 있으나, 이제는 이를 기반으로 업종별, 규모별 특성을 고려한 차별화된 정책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은 매년 평가를 통해 '인구경영 우수기업'을 선정하고 있다. 해당 기업의 실무진과 심층 인터뷰를 해보니, 각 기업의 고유한 여건과 특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일과 가정의 조화가 구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기업은 경영진의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또 다른 기업들은 자율적 조직문화나 유연한 근무제도, 체계적 경력관리 시스템 등을 통해 각자만의 일과 삶의 균형을 실현하고 있었다.

더욱 흥미로운 발견은 유연근무와 재택근무가 잘 정착된 기업에서 육아휴직 사용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일부 IT 기업에서는 휴가 사용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자율 근무가 가능한 환경에서 장기간의 육아휴직이 불필요하다고 인식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필요시 유연한 시간 조정과 재택근무를 통한 육아와 업무의 병행이 경력 단절 없이 일과 가정을 조화시키는 더욱 현실적인 방안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제조업에서는 현장 업무의 특성상 재택근무가 어려워 육아휴직이 필수 제도로 인식된다. 이들 기업은 육아휴직 기간을 법정 기준을 상회해 운영하거나 복귀 후 단계적 근무시간 조정 등으로 실질적 지원을 제공한다. 이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진정한 일과 삶의 균형은 특정 제도의 유무가 아니라 기업의 전반적인 근무 문화와 시스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책과 평가 체계도 이런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단순히 육아휴직 사용률만으로 기업의 가족친화 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근무시간의 유연성, 장소의 자율성, 성과 중심 평가 문화 등 일하는 방식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핵심은 '상호 호환성'에 있다.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제도와 병행하거나 상황에 따라 대체할 수 있는 유연적 접근이 필요하다. 육아휴직 사용률이 낮더라도 직원들이 유연근무제로 일과 육아를 병행한다면 이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제도의 형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정성과 실효성이다.

기업 규모와 업종별 특성을 고려한 차별화된 평가 기준도 마련돼야 한다. 대기업에는 포괄적 복지 제도를, 중소기업에는 실용적 지원을, 스타트업에는 자율성과 유연성 중심의 문화 조성 등 각각 상이하게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기업 실무진과의 직접적인 논의에서도 '근무 유연성 지표' 신설, 우수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확대, 기업 규모별 맞춤형 지원 등이 향후 정책 과제로 제시됐다.

인구위기라는 거대한 도전 앞에서 우리는 때로 가시적 숫자에만 매몰되기 쉽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기업 문화의 근본적 전환에서 시작된다. 억지로 제도를 늘리고 의무를 강화하는 것보다 일하는 방식 자체를 사람다운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더 근본적 해법이다. 그런 문화가 정착된 곳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고 기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기업과 스타트업도 각자의 상황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직장과 가정의 조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의 인구경영은 제도의 나열이 아니라 문화의 혁신이어야 한다. 기업들이 각자 특성에 맞는 가족친화 모델을 찾아가고, 정책은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인구경영이자, 누구나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첫걸음일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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