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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진시황을 닮은 한무제는 왜 유교를 국교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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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7. 20. 18:21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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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유가와 법가의 결합하는 정치적 마술이 중화 제국의 장기 지속을 가능하게 했다는 논지를 펼쳤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외계인 미도는 다시 물었다.

"놀랍고 신기할 따름입니다. 진시황은 중화 제국의 제도적 기초를 놓고 중앙집권적 행정 체제를 만든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중화 제국 2000년 내내 역사의 악인이라 비난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이라지만, 왜 하필 한무제가 법가 대신 유가 사상에 기울었을까요? 저의 관찰로는 유학의 국교화야말로 2000년 존속된 중화 제국의 예외적 성공을 말해주는 열쇠인 듯합니다."

한무제는 군현제를 강화해서 중앙집권적 행정 체제를 구축한 인물이다. 북쪽 변방의 흉노족을 치고, 동으로는 한반도로 진출하여 한사군을 설치했으며, 중앙아시아로 열리는 비단길을 개척했다. 그는 밖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안으로 중앙집권적 행정 체제를 정비했다. 한무제는 진시황이 시작한 제국 건설의 프로젝트를 완성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왜 한무제는 진시황을 악마화한 유생들의 논리를 수용하여 유교를 국교로 삼아야만 했을까?

미도가 되물었다.

"유가 경전에 제시된 이상적 제도는 천하를 하나로 통일한 진시황의 군현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천하를 천팔백국(千八百國)의 연합체로 유지했던 주공의 분봉제(分封制)입니다. 대체 유학이 어떤 가르침이길래 한무제는 진시황이 불태우려 했던 그 유교 사상을 되살렸을까요?"

산둥(山東) 고분 벽화에 그려진 공자의 초상화
2000여 년 전 산둥(山東) 고분 벽화에 그려진 공자의 초상화.
◇한무제와 유교의 국교화

진시황의 제국 프로젝트를 완성한 한무제는 진시황이 신봉했던 법가 사상 대신 유가 사상을 국교로 삼았다. 양자의 통치 철학은 표면상 완벽하게 배치된다. 진시황은 법가의 논리 위에서 분서(焚書, 경전을 소각)하고 갱유(坑儒, 유생을 매장)했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삼았다는 점만 보면, 그가 진시황을 부정하고 비판했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실은 한무제 역시 진시황 못잖게 사상 통일을 추구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사상 통일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한무제는 진시황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35년 한무제는 "백가(百家)의 사상을 모두 폐기하고 유술(儒術)만을 존중"하는 유교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그는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를 완성했으며, 유가 경전에 관한 지식을 관리 선발의 기준으로 채택했다. 또한 그는 문묘(文廟)를 건립하고,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공자에 참배했다. 유교 군주(Confucian monarch)로서 한무제는 유교의 가르침을 보급하고 실천하려 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유교의 국교화는 국가권력에 의한 하향적(top-down) 이념 확산의 과정이라 볼 수도 있다. 중국 학계의 주류 학자들은 서한(西漢)의 유생들이 중앙집권과 전제주의를 옹호했던 "봉건 지주계급"이며, 유가 경학은 중앙집권적 전제주의 이념이라 단정한다.

한무제는 왜 하필 유교를 국교로 삼아야만 했을까? 단지 여론 통제와 풍속 단속을 위한 사상 통일 정책이었을까? 얼핏 보면 그렇게 여겨질 수 있지만, 유가 경전은 중앙집권적 통일 제국이 아니라 분권적 지방자치를 좋은 통치의 기본 제도로 칭송한다. 모름지기 유교는 개인의 도덕적 자발성과 향촌 공동체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가르침이었다. 당시 유가 사상을 설파한 인물들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소실된 유가 경전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던 경학자(經學者)들이었다. 진·한 교체기 그 유생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유가 경전은 한무제 때에 이르러 마침내 국서(國書)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유생들은 경전 속에 불변의 가치와 불멸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경전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있었기에 유생들은 평생에 걸쳐 경학(經學)을 연구했다. 경학은 망실된 고경(古經)을 복원하고, 경문(經文)의 원의(原意)를 주해(注解)하고, 성현(聖賢)의 훈시(訓示)를 증득(證得)하고, 나아가 문명의 원리를 궁구하는 인문학적 정신활동의 요체였다. 무엇보다 유생들은 경학을 통해서 동아시아 문명권의 보편가치와 통치 이념을 생산했다.

유가 경전에 제시된 이상적 제도는 통일 제국이 아니라 '천팔백국'의 봉건 영주들이 세습 군주로서 각자의 영지를 다스리는 다자 통치(polyarchy) 혹은 지방분권적 연방제였다. 당연히 통일제국의 군현제와 유교적 통치 이념 사이엔 커다란 모순과 부조화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한무제는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104]의 제안에 따라 유교를 국교로, 오경(五經)을 국서(國書)로 삼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방대한 영토를 확보한 제국이 안정된 통치를 이어가기 위해선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며 수백, 수천 가지 토어(土語)를 사용하는 각양각색 종족들의 다양한 문화와 습속을 포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다양한 종족과 집단이 공존하려면 부족주의와 집단주의 대신 보편주의가 필요하다. 국가가 세금을 걷고 인력을 징발하고 범법자를 처벌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공공선을 실현한다는 믿음을 주어야만 한다.

그런 믿음은 절대로 쉽게 생겨날 수 없다. 국가에 대한 인민의 신뢰나 불신은 실생활 구체적 체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선 인민 대다수의 일반 정서를 수용하고 보편가치를 선양해야만 한다. 바로 그 점에서 법가 사상보다 유가 사상이 제국의 통치에 더 유용했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비록 마키아벨리적인 권모술수를 쓰더라도 권력을 장시간 유지하기 위해선 언필칭 천명(天命)과 덕치(德治)를 내세워 인민대중의 마음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마상득지(馬上得之), 마상치지(馬上治之)

비운의 패왕 항우(項羽, 기원전 232-202)를 물리치고 한 제국을 세운 유방(劉邦, 기원전 247?-195)은 평민 출신으로 천하를 제패한 무학(無學)의 창건 군주였다. 유방을 도와 건국 초기 제국의 질서를 세운 육가(陸賈, 기원전 240-170)는 황제가 된 주군을 향해 "말을 타고 천하를 얻을 순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냐?" 물었다. 제아무리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군주라 해도 총칼만으로는 국가를 통치할 수 없다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육가의 말마따나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제국은 실로 막강한 군사력을 발휘했음에도 불과 15년 만에 허망하게 무너졌다. 가혹한 토목공사에 끌려갔던 농민들조차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냐?"며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어떤 권력자든 장시간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다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통치자는 어떻게 해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외적을 물리치고, 치안을 유지하고, 민생을 살려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수밖에 없다. 통치자가 대중의 마음을 사서 자발적 복종을 유도할 수 있다면, 장시간 안정된 질서를 유지할 수가 있다. 다수 대중이 세금을 뜯어가는 국가를 "우리나라"라 여기고, 그 정부의 수장을 "우리 임금"이라 여긴다면 어느 누가 그 나라를 허물 수 있겠는가?

현대 사회과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규모, 어떤 형태든 한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선 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해야만 한다. 동서고금 언제 어디서나 대개 국가란 배타적 영토 내에서 정당하게 합법적으로 무력을 독점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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