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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의 붕괴와 혼란 시기 일본의 외교와 모략공작은 성공적이었다. 독일주재 일본대사관 무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는 대(對)러시아 분열공작으로 러일전쟁의 승리를 배후에서 지원했다. 그리고 일제의 한일병합 직전인 1910년 7월 조선주재 초대헌병사령관겸 정무총장으로 부임해 독립운동 탄압과 만주조선(滿鮮) 공작활동에 전념했다. 러일전쟁 중에 아카시 한 사람이 사용한 비밀공작금은 당시 일본정부의 1년 예산 2억3000만엔 중에 약 100만 엔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1931년 7월에는 만주 완바오산(萬寶山)사건이 발생해 국내언론의 오보로 선동되어 많은 수의 한국 내 중국인들이 살해되고 반중감정이 격화되었다. 한·중 간 충돌을 원하는 일제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일제는 두 달 후 9월에는 노구교사건을 조작해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다음 해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만들어 중국을 분열시켰다. 1997년 홍콩과 1999년 마카오를 반환받기까지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중국인들의 피해의식은 중화민족주의를 배양하는 배경이 되었다. 대한민국 역시 상해와 중경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일제에 항쟁했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모든 사항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우리 정부가 결정하겠지만 대한민국 고위인사의 참석은 임시정부의 역사를 감안하면 적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간 정체된 북방외교가 추동력을 받게 될 것이다. 불참 경우에는 과거 박근혜 대통령의 참석과는 다른 결정으로 무원칙하다는 평가를 불식할 명분과 실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딜레마는 '관세전쟁'으로 대변되는 미국과 중국 간 패권투쟁으로 좁아진 우리의 입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전승절'과 한국전쟁과의 관련성이다. 중국 외교부와 관영언론이 '전승절'을 "일본의 침략에 대한 중국 인민의 항전과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Chinese People's War of Resistance Against Japanese Aggression and the World Anti-Fascist War)" 기념행사라고 한 발표와 다를 가능성이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의 건국 이후 한국전쟁을 비롯해 치렀던 모든 전쟁을 함께 모은 '전승절' 기념행사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세계 주요국 정상들을 초청하는 외교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것이어야 함이 당연하다.
한·중 간 주요 갈등 지점은 경제와 통상 그리고 역사문화와 북한문제 같은 사안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필수적 부분이기에 전략적 사고가 요구된다. 더구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북·러 관계의 전례 없는 밀착과 북한 내 정변 발생 경우를 예상하면 중국과의 외교는 필수적이다. 따라서 복잡한 문제일수록 기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과 중국 간의 대결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과는 양상이 다르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과거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처럼 완전히 차단된 관계가 아니며 두 나라는 정치와 경제를 위시하여 복수(複數)의 트랙에서 견제와 타협을 중첩해 진행하고 있다. 강대국인 미중의 투쟁 원인과 방식 그리고 결과가 한국과 다르다는 점에서 행사의 성격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교훈에 대한 원칙과 주장이 없이 기회주의적이거나 피동적인 그레이존으로만 인식된다면 양측 모두로부터 경시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외교에 철학이 없으면 국가에 정신이 없는 것과 같다.
'전승절' 행사는 반제국주의 반침략 전쟁이라는 명분을 국제사회에 내세우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이 참석할 경우에는 세계대전의 재발 방지와 공동번영을 위한 평화의 장(場)이 되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의 역사에는 한(漢)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운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해 일제의 침탈에 항거한 독립운동까지 일관되게 반제국주의 정신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느 의미에서 현(現) 시기는 제1,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세계와 유사하다. 이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평화구축은 중요하고 이것은 중국의 양안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승절'이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자기모순에 빠지면 안 되는 것이다.
1945년 종전을 앞두고 국공합작으로 단합한 중국은 포츠담과 카이로에서 미국과 함께 연합국 회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반(反)나치즘과 반파시즘 그리고 반제국주의는 유엔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 이후 동서 진영 간의 대결이 첨예하던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우리 정부는 과감히 '벽을 넘어서'를 표어로 걸었다. 그리고 국제정치학자들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3년 후 소련은 해체되고 독일은 통일을 이뤘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한국은 동북아의 창이 될 수도 방패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전쟁이 아니라 평화의 다리가 되도록 하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존중받을 한국의 역할일 것이다. 근대 제국주의의 환상을 좇았던 일본은 21세기 동북아 정세의 불안정 속에 적극적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한편 전쟁이 가능한 극우주의로의 회귀 중에 진로를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제80주년 '전승절' 행사는 중국뿐 아니라 미래세계의 평화를 위한 모범적 행사가 되어야 한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