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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파괴를 계기로 프랑스는 자유·평등·박애의 혁명시대로 진입했다. 이후 발생한 수차례 정치변동과 나폴레옹의 전제군주제로 회귀한 사실로 본다면 여기에는 역사가들의 다양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이 중에 1803~1815년간 나폴레옹 전쟁의 후과는 컸다. 워털루에서의 패배 후 1815년 11월 제2차 파리조약에서는 배상금 7억 프랑과 외국군 15만6000명의 프랑스 주둔으로 혹독한 제재가 부과되었다. 주변국에는 어부지리를 주어 벨기에는 영토에서 분리된 후 독립국이 되었고 유럽사는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프랑스의 국세하락을 주목한다. 1807년 피히테는 프랑스군의 점령 아래 '독일국민에게 고함'을 강연하면서 민족혼을 고취했고 1822년 헤겔은 '역사철학 강의'를 통해 게르만 민족의 역사적 사명과 비전을 제시하면서 독일 부흥의 단초를 열었다.
이 시기 신대륙 호주는 1770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의 엔데버(Endeavour)호가 동부 멜버른 근처 보타니만(灣)에서 개척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후 영국은 1788년 1월 최초로 이민자와 죄수 1500여 명이 탑승한 11척의 이민선을 시드니항(港)에 보내 정착을 시작했다. 그리고 1836년까지 호주 전역을 장악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만드는 중요한 축이 되었다. 프랑스는 1772년 호주 서부해안을 탐험했지만 혁명전야의 정국혼란 속에 추동력을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1801년 5월부터는 프랑스 함대가 3년간 동식물을 채취해 파리의 식물원으로 보냈다. 나폴레옹은 1814년 호주원정을 계획했지만 공략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만일 당시 프랑스가 호주대륙을 영토로 확보했다면 21세기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근대사의 중요시기 프랑스가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보낸 것은 영국이 협상과 절충으로 국가의 점진적 발전과 의회민주주의를 이룬 것과 대조적이다. 이 시기 영국은 제철기술 발전에 힘써 함선과 함포를 개량하고 강한 해군을 육성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해군이 정예장교를 육성하는 과정은 '캡틴 호레이쇼 혼블로워(Captain Horatio Hornblower)'로 수차례 영화화되어 청소년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극단적 정치투쟁 중에 인재를 키울 기회보다 인재가 살해될 기회가 만연한 사회였을 것이다.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에서 국민들이 국가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과정을 금빛 레이스(Golden Lace)를 짜나가는 것에 비유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길은 핏빛에 가까웠다. 소설은 기요틴으로 향하는 사형수의 마차행렬에 환호하는 파리시민들과 단두대에서 떨어지는 머리수를 세며 뜨개질하는 혁명 부인을 보여준다. 작가가 도입부에 보여준 붉은 포도주로 벽에 쓴 '피(Blood)'라는 낙서로 유추한다면 그녀는 증오가 담긴 진홍빛 레이스를 짜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은 지난 8년간 세계정치사에 유례가 없을 두 명의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고 한 명의 전직 대통령부인이 구속되었다. 2017년 '촛불혁명'과 2025년 '빛의 혁명' 그리고 '장미대선'으로 불린 정치변동이었다.
그러나 법치국가의 의사결정이 군대의 동원과 대규모 군중집회 그리고 폭력행사와 같은 사건의 잦은 발생으로 추동된다면 국가의 구심력은 약해지고 외교의 방향성은 흔들린다. 정치가 대결과 투쟁으로 일관된다면 현대의 정당정치 역시 조선시대의 사화(士禍)나 당쟁(黨爭)과 다름없을 것이다. 더구나 정치활동이 로마의 서커스처럼 희화화하고 사회를 분열로 이끈다면 국가공동체는 쇠퇴의 길로 가게 된다. 우리가 간혹 비교하는 일본은 2000년대 급격한 개인주의의 물결 속에 공동체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일본을 위한 젊은이들의 연대감을 신사(神社)의 붉은 실(絲)로 상징하고 젊은세대에게 이토모리 마을을 지켜주도록 미래지향의 메시지를 전한다. 인생 말년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일본의 청춘들에게 보내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21세기 세계 속 일본의 지도적 역할을 당부하고 있다.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의 종반부 제목을 '금빛 실(Golden Thread)'로 했다. 그리고 주인공 시드니 칼튼(Sydney Carton)의 고결한 희생을 황금 레이스(Golden Lace)를 짜는 행동에 비유했다. '케데헌'의 주인공도 부모가 남긴 악의 흔적(Patterns)을 극복하고 세상을 구하는 빛나는 아이돌(Idol)이다. 우리 사회에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한국전쟁 그리고 압축성장의 후과인 수많은 부(否)의 유산이 남아있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한국인들은 어느샌가 새로운 성공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때문에 기성세대는 다음세대가 얽힌 매듭을 풀고 금빛 실을 짜나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다시 도약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