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경희궁길에 자리한 성곡미술관이 개관 30주년을 맞아 특별 기획전 '미술관을 기록하다'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지난 30년간의 발자취를 단순히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술관이라는 장소에 켜켜이 쌓인 시간과 기억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하는 실험적 프로젝트다.
성곡미술관은 기업가이자 교육자, 정치가였던 고(故) 김성곤(1913~1975) 선생의 철학을 바탕으로 1995년 문을 열었다. 예술과 교육을 국가의 미래 동력으로 본 그의 신념은 고(故) 김석원(1945~2023) 이사장에 의해 이어졌고, 이곳은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립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성곡내일의작가상', '성곡오픈콜', 해외 교류전, 중견·원로작가 조명전 등 꾸준한 기획을 통해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담아왔다.
이번 전시에는 국내외 작가 14인이 참여해 회화, 사진, 설치, 영상,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로 미술관과 주변 환경을 탐구했다. 모든 작품이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된 신작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작가들은 2023년부터 장기간 미술관을 방문하고 관찰하며, 공간의 역사와 풍경, 정원과 계절의 변화까지 감각적으로 기록해냈다.
13. 이창원, 〈성곡의 조각들
0
이창원의 '성곡의 조각들'. /성곡미술관
조각가 이창원은 흰색 나무 패널 위에 커피 가루를 뿌려 조각정원의 풍경을 후각과 시각으로 동시에 형상화했다. 입구에서는 이세경의 도자 작품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그는 실제 머리카락을 사용해 미술관 전경과 설립자 흉상을 새겨 넣어,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오브제를 만들었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루스는 전시실 전체를 하나의 캔버스로 삼아 특정 지점에서만 완전한 도형이 보이는 아나모르포시스 작품을 설치했다. 관람객의 시선에 따라 형상이 흩어지고 모이는 그의 작업은 "우리는 무엇을 보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ㅇ
0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프랑스 작가 조르주 루스. /사진=전혜원 기자
사진작가 윤정미는 여름철 조각정원의 풍경을 기록해, 고목과 조각, 식물들이 어우러진 시간의 결을 포착했다. 민재영은 4년 전 개인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수묵화 '도시·전시·정원'을 선보이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정서를 독창적 화풍으로 표현했다. 김수영은 2관 건물의 일부를 확대해 낯선 시각을 제시하며 도시 건축에 대한 사유를 유도한다.
박문순 성곡미술관장은 "성곡미술관은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조망하고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며 학술·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해왔다"며 "앞으로도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