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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허리가 잘린 이사(李斯), 칼부림 당한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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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9. 28. 17:40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56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중화 대륙에 진·한 제국이 들어서던 시기, 지중해 세계에는 헬레니즘 제국에 이어서 로마제국이 일어났다. 고대 세계 유라시아 대륙 교류가 거의 없는 전혀 다른 두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영토나 인구 면에서 얼추 견줘볼 만한 비슷한 규모의 거대 제국이 건설됐다는 사실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소규모 농촌 마을에서 시작된 인간의 공동체가 도시국가, 영토국가를 거쳐 급기야 거대 제국으로 흡수되었다. 인간이 제국을 건설하는 근본 동기는 무엇인가? 천하 정복을 꿈꾸는 야심가의 등장인가? 더 넓은 땅을 빼앗고 시장을 확장하려는 물질적 욕망인가? 침략 전쟁을 끝내려는 평화에의 갈망인가? 야만족을 교화하고 반인류적 만행을 응징하려는 문명인의 사명인가? 제국의 출현은 진정 역사적 필연인가?

"역사적 필연"이란 문구 속엔 물리 세계에 작용하는 열역학 법칙처럼 인간의 역사에도 모종의 인과율이 작용한다는 발상이 깔려 있다. 19세기 중엽 역사적 유물론을 제창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실제로 그렇게 인류사 전체를 통째로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 역사 발전의 법칙을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이미 100년 넘게 공산 정권의 흥망사를 관찰해 온 2020년대 교양인으로선 그들처럼 "역사의 필연"이란 문구를 자신 있게 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역사적 필연인가?" 되묻는 까닭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이 두 제국을 살펴보면 결코 우연이라 볼 수 없는 절묘한 유사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동상
로마에 세워진 카이사르의 동상. /출처=위키피디아
◇진(秦) 제국과 로마제국의 비교

전국시대 서쪽 변방에서 일어난 진시황(秦始皇, 재위 기원전 221~206)은 중국사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웠으나 그가 죽자 진 제국은 창건 15년 만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내전을 거쳐 새롭게 등장한 한 제국은 진 제국의 가혹한 통치를 비판하며 유교를 채택했음에도 진 제국의 중앙집권적 통치 시스템만은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

이탈리아반도의 작은 도시국가 로마가 강성한 제국으로 성장하기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은 단연 카이사르(기원전 100~44)였다. 갈리아를 정복하여 로마의 영토를 북대서양 연안까지 확대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기원전 106~48)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종신 독재자가 되었나 원로원의 반대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최초의 통일 제국을 창건한 진시황은 스스로 황위에 올라 15년간 천하를 직접 다스리며 이후 중화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제후국을 철폐한 후 군현제로 천하를 재편하고, 법제를 균일화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을 통합하는 광범위한 도로망을 구축하고, 갑옷과 병기를 규격화했으며, 사상 통일을 추구했다.

카이사르는 내전을 종식한 후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온 여러 지역을 통합했으며,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로마 공화정을 무력화하고 실질적인 제정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갈리아나 스페인 등을 병합한 후엔 그 지방 사람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통합 정책을 펼쳤으며, 알렉산드리아 천문학에 근거하여 지중해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율리우스력을 제정했다. 종신 집정관이 된 후 그가 지중해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는 제국적 통합의 길을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통일 제국의 업적을 닦았음에도 진시황은 사후 역사의 악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유학 말살 정책을 펼쳤던 승상(丞相) 이사(李斯, 기원전 284~208)에 대한 유생들의 원한과 복수심이 작용했겠지만, 더 본질적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제국의 질서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저항심이 컸던 듯하다. 유가를 국가 정통 이념으로 채택한 한 제국에서 진시황과 이사는 역사의 악인으로 갈가리 찢겼다. 그럼에도 한 제국은 진시황이 고안했던 중앙집권적 관료 행정 체제를 그대로 살려서 계승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카이사르 역시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여 로마의 영토를 확대하고 제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던 제국적 통합을 이루었음에도 공화정의 붕괴를 곧 독재자의 출현이라 여기고 경계했던 로마 원로원의 핵심 인원들은
카이사르의 몸에 칼집을 놓았다. 그렇게 카이사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놀랍게도 후대의 역사에서 그는 불멸의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카이사르'라는 그의 이름자는 로마뿐만 아니라 이후 독일(카이저)과 러시아(차르)에서도 황제의 극존칭으로 사용됐다.

진 제국을 창건한 진시황은 2000여 년 악인으로 비판받다가 1950년대 중국의 공산 정권 아래서야 개세(蓋世) 영웅으로 재평가되었다. 로마제국을 정초한 카이사르는 공화정을 배신한다는 이유로 원로원 귀족들에 의해 비록 잔혹하게 살해됐지만, 머잖아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서기 14)가 실질적인 황제의 지위에 올랐을 때부터 그는 희대의 영웅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


◇최초의 제국 건설, 목숨을 건 정치 도박

진 제국과 로마제국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은 단연 진의 승상 이사와 로마의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였다.

이사는 진시황에게 천하통일의 중요성과 제국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 법가 사상가였다. 그는 봉건적 세습 군주가 지배하는 다자(多者) 지배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황제 일인(一人)이 지배하는 중앙
집권적 관료 시스템을 설계하고 입안하고 실현했다. 이사가 없었다면 진시황은 기껏해야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의 하나로 남아 지역 맹주로 자족했을 법하다. 이사는 천하를 통일해 2000년 지속되는 황제 지배체제를 처음 도입했던 정치 혁명가였다. 천하의 질서를 새로 짰던 이사였으나 진시황이 사망하자 곧 환관 조고의 계략에 넘어가 반란죄를 뒤집어쓰고 극형에 처해졌다. 산 채로 허리가 잘리는 요참(腰斬)이었다. 세계사에서 가장 긴 세월 존속한 중화 제국의 기본 틀을 설계한 인물 이사는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진시황(秦始皇) 석상
진시황(秦始皇) 석상. /출처=위키피디아
로마사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후 5년 동안이나 독재관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급기야 기원전 44년 2월(?) 그는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지만, 한 달쯤 지난 3월 15일 그는 처참히 살해당하고 말았다.

당시 상황이 기록된 여러 사료에는 원로원에서 카이사르 암살을 공모한 자들의 수가 대략 60명 이상이라 적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원로원의 공모자들은 카이사르를 정기 모임이 예정돼 있던 폼페이 극장으로 유인했다. 카이사르가 들어서기 무섭게 그들은 일시에 뛰어나와 돌아가면서 23회나 그의 몸에 칼집을 놓았다. 이 기록은 다소 과장이 있을지언정 대체로 사실에 가깝게 느껴진다.

로마 시대 1차 사료들엔 카이사르가 그의 숙적 폼페이우스의 동상 아래서 토가(toga)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쓰러져 숨을 거뒀다고 적혀 있다. 황제의 야심을 보이는 카이사르에게 대항하여 로마 공화정의 수호를 명분으로 내걸고 싸웠던 인물이다. 폼페이우스는 공화정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내전에 돌입했다. 폼페이우스에 대한 카이사르의 승리는 공화정에 대한 제정의 승리를 상징할 수 있다. 그런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동상 밑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제국에 대한 귀족 세력의 저항심을 빼고선 설명될 수 없다.

이사와 카이사르는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토록 잔혹하게 살해당해야만 했을까? 그들은 역사의 전환기에 거대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제국 건설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정치 혁명이었기에 반혁명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두 사람 모두 정쟁에 휘말려 참살당했지만, 그들이 표적이 된 진짜 이유를 따져 보면 견고한 전통의 강둑을 무너뜨려 불가역적인 급변의 큰 물줄기를 텄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모름지기 혁명이란 목숨을 바쳐 천하를 얻는 정치적 도박이기에.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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