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업의 선택이 만든 공동체의 기억, 산업과 문화가 만나는 빙판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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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속 유일한 한국팀의 정체성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는 2003년 출범한 동아시아 기반 리그다. 일본과 한국이 중심이며 어떤 시즌에는 중국이나 러시아 팀이 참여했지만 현재는 일본 구단들과 한국의 HL안양이 리그를 구성한다. 중심이 일본에 있다는 점은 알려진 사실이고, 한국 팀이 단 한 곳이라는 점은 리그의 명칭과 실체가 만나는 지점에서 늘 논쟁을 낳는다. 그럼에도 시즌은 이어졌다. 팬데믹으로 일정이 흔들렸던 시기에도 리그는 축소·조정·중단을 반복하며 명맥을 붙잡았고, HL안양은 참가 의사를 거둔 적이 없다. 리그의 기초 체력은 풍성하다고 할 수 없지만, 아이스하키가 동아시아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구조로 기능해 왔다.
HL안양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한국 대표 하키단이다. 명칭과 로고가 시대에 맞춰 변했지만 안양이라는 연고와 빙판 위에서 쌓아 온 성취는 꾸준했다. 한국 내 유일한 프로급 팀으로 남아 있다는 현실은 이 팀의 존재 이유를 더 분명히 만든다. 국가대표팀 선수 다수가 HL안양을 거쳤고, 시즌 일정이 정체될 때에도 구단은 훈련 루틴을 유지하며 선수단의 경쟁력을 관리해 왔다. 성적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계속 뛰는 팀만이 다음 시즌을 말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이 구단은 매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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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아이스하키의 산업적 기반은 넓지 않다. 등록 선수는 수천 명 수준에 머물고, 정식 링크 수 역시 주요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대학 팀 수가 적고 프로팀이 사실상 한 곳뿐인 피라미드는 선수의 진로를 좁힌다. 지도자 시장이 작아 은퇴 후 경력 관리가 어려운 것도 현실이고, 링크 유지비와 장비 비용 같은 고정비는 다른 실내 종목보다 높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 인식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시장의 자연 성장만으로 종목이 버티기 어렵다. 최소한의 공공 지원과 기업의 지속 의지가 함께 작동해야 생태계가 유지된다.
안양빙상장은 시가 보유한 체육시설로 좌석 규모가 크지 않다. 그럼에도 홈경기일이면 만석에 가까운 풍경이 반복된다. 노후화된 설비를 정비하고 링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손이 많이 간다. 대체 경기장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점은 모든 결정을 보수적으로 만들지만, 구단은 연고지의 연속성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있다. 도시는 경기장을 관리하고, 구단은 그 공간을 지키며, 팬은 매 시즌 그 자리를 채우는 삼각 구조가 오랜 시간 유지돼 왔다.
HL그룹은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기술과 품질을 중심에 둔 회사가 아이스하키단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지켜온 건 한국 스포츠 산업에서 드문 사례다. 과거 여러 기업 실업팀이 재편 과정에서 사라졌을 때도 이 팀은 남았다. 회사가 하키를 'CSR의 부수 항목'이 아닌 '장기적 책임'의 언어로 설명해 온 이유는 단순하다. 종목의 기반이 무너지면 다시 세우기 어렵고, 지역과 기업이 공유한 시간은 재현하기 힘들다.
따라서 구단 운영은 비용 절감의 대상이기보다 기업의 신뢰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키단 운영이 단기 마케팅이나 캠페인과 다른 점은 '끊기지 않는 시간'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에 닿아 있다. 이러한 방향성은 HL그룹 회장이자 HL안양 구단주인 정몽원 회장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된다.
경제 논리로만 보면 분명 효율적인 선택은 아니다. 연간 구단 운영 비용이 약 30억~35억 원에 달하는 반면, 1,200석 규모의 작은 좌석 수로 입장 수입이 제한적이고, 중계권과 스폰서 매출 역시 크지 않다. 원정 이동이나 장비 운송, 링크 유지에 드는 고정비는 쉽게 줄일 수 없다. 하지만 이 비효율은 곧 책임의 다른 이름이었다. 단순한 손익 계산으로 팀의 존재 가치를 판단할 수는 없다.
스포츠는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를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문화적 장치다. 이익을 내는 기업의 활동이 경제를 움직인다면, 손익을 넘어 지속하는 팀은 공동체의 기억을 움직인다. HL안양의 존재는 수익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방식을 증명하는 일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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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하키의 생태계는 유소년과 학교 팀을 기반으로, 사회인 클럽과 실업·프로팀, 그리고 국가대표팀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이 체계를 구성하는 어느 한 축이 흔들리면 전체의 순환이 약해진다. HL안양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 순환을 지탱하는 장치다. 이 장치는 숫자로 보기 어려운 가치, 즉 '존재의 수익'을 만든다. 팀이 시즌을 완주하면 그 자체가 지역사회에 제공된 공공재가 되고, 국가대표가 유지될 최소한의 환경이 생긴다.
일본의 아시아리그 클럽들은 지방정부, 지역 기업, 팬 커뮤니티와의 협업 구조를 채택하고, 리그 차원에서는 일부 구단이 일본스포츠진흥센터(JSC)의 간접 지원금을 받으며 재정 리스크를 완화한다. 이러한 공공 및 지역사회 기반의 투입과 중계 접근성 확대는 구단이 재무 부담을 덜고 경기력과 커뮤니티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반면, 한국 아이스하키는 민간 기업의 책임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서, 특정 기업의 헌신이 곧 종목의 존폐를 결정하는 변수가 된다. 경기장의 좌석 수가 같더라도 공공 예산, 안정적인 방송 노출, 교통 인프라 같은 외부 요소의 조합에 따라 수익 구조가 달라지는데, 한국 하키는 이러한 공공 기반의 지원 조합이 현저히 부족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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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의 언어로 옮기면 과제는 분명하다. 무엇보다 리그 참가의 안정성이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HL안양은 2025-26시즌에서 홈 15경기, 원정 25경기를 소화한다. 일본 팀들이 대부분 비슷한 일정 속에서 이동 부담이 적은 반면, 한국 팀은 모든 원정을 해외에서 치러야 한다. 리그 내 유일한 비일본 팀으로서 체력적·재정적 부담이 크고, 일정 편성에서도 불리함이 존재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국 팀의 존재가 리그의 다양성을 상징하면서도, 운영상으로는 여전히 부담으로 취급된다"는 평가도 나온다.
또한 한국은 리그 내 유일한 팀이라는 특성상, 국내 상위권 선수들이 모두 HL안양에 집중된다. 전력 면에서는 경쟁력이 되지만, 결과적으로 리그의 균형을 해치는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HL안양이 매 시즌 우승권을 다투는 구조가 고착되면서, '아시아리그'라는 이름 아래 공존해야 할 다양성이 오히려 축소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리그가 '아시아'라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단일 구단의 헌신에만 의존하지 않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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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의 해법은 단순한 제도 조정이 아니라 구조의 복원에 가깝다. 리그 내 형평성 확보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한국 내 두 번째 팀의 탄생이다. 한 팀이 모든 국가대표와 유소년 시스템, 리그 운영의 무게를 동시에 감당하는 현실은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경쟁 구도가 있어야 종목은 살아 있고, 지역이 달라야 팬이 생긴다. HL안양이 버텨온 지난 세월은 존속의 기적이었지만, 다음 세대의 성장을 위해선 '다음 팀'이 필요하다. 산업적 이해보다 공동체적 책임, 시장 논리보다 문화적 연대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시점이다.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답은 단순해진다. 시즌이 시작되고 끝나는 사이, 아이는 성장하고 부모는 다시 표를 예매한다. 선수는 루틴을 이어가고, 코치는 다음 세대를 살핀다. 기업은 또 한 해의 운영 계획을 세운다. 이 느리지만 꾸준한 반복이 한국 아이스하키를 지탱해 왔다. 경기의 간격이 길고, 시즌 중 공백이 있더라도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계절의 스포츠'가 아니라 '생활의 스포츠'로 남는 길은, 이렇게 한 시즌을 꾸준히 이어가는 데서 시작된다.
HL안양의 존재는 산업과 문화가 만나는 접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산업의 언어로는 손실이지만, 문화의 언어로는 축적이다. 구단이 선택한 지속은 지역의 기억을 보존하고, 유소년의 기회를 만들며, 국가대표 시스템의 바탕을 유지한다. 리그의 이름에 '아시아' 명칭의 상징이 유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팀이 한 자리라도 지키고 있는 한, 동아시아 아이스하키의 등불은 완전히 꺼지지 않는다. 구단이 다음 시즌의 참가를 확정하는 순간, 국내 유소년과 사회인의 훈련·대회 캘린더가 동시에 살아난다. 팀 하나가 종목 전체의 시간표를 여는 셈이다.
개막전이 끝나면 조명은 서서히 낮아지고, 관중은 질서 있게 출구로 향한다. 얼음 위에는 스케이트 자국이 겹겹이 남고, 장비팀은 다음 일정을 준비한다. 보도자료에 적힐 통계는 많지 않지만, 그 적음이 곧 무의미를 뜻하지는 않는다. HL안양은 결과보다 과정을 증명하는 팀이다. 적은 좌석, 제한된 수입,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다음 시즌을 말하는 팀. 그 존재만으로 한 종목의 생태계가 연결되는 팀. 팀의 생존은 도시의 문화 지형과 선수의 커리어, 그리고 지역 유소년 시스템과 하키 인프라의 흐름까지 함께 움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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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길은 여전히 간단하지 않다. 비용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인력과 시설의 수급도 빠르게 나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하다. 리그의 틀을 다듬고, 미디어의 문턱을 낮추고, 유소년의 입구를 넓히고, 공공과 민간의 역할을 재배치하는 일. 이 네 가지가 움직이면 '버팀'은 '존속'으로, '존속'은 '발전'으로 이름을 바꿀 수 있다. 구단의 언어로 말하면, 다음 시즌을 준비하되 다음 세대를 함께 준비하는 일이다. 스포츠의 현재와 미래를 같은 캘린더 위에 올리는 일이다.
결국 이 팀의 스토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누군가는 얼음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 HL안양은 그 역할을 오랫동안 맡아 왔고, 오늘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 반복의 가치는 때로 숫자로 설명되지 않지만, 사회는 그 가치를 정확히 기억한다. HL안양의 빙판은 하나의 경기장이자, 한국 스포츠 산업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시장 논리로만 설명할 수 없는 지속의 가치, 그 위에서 또 한 시즌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