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1 | 0 | 서울월드컵경기장에 구현된 LED 카드섹션. 붉은색과 파란색 조명이 '한계를 넘어 하나된 Reds' 문구를 완성하며, 경기장 전체를 하나의 응원으로 묶었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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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10월 A매치 기간, 서울월드컵경기장(상암구장)의 관중석은 유난히 밝았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좌석 곳곳에서 빛이 일제히 켜졌다. 손전등도, 휴대폰 화면도 아니었다. 관중들이 앉아 있는 자리마다 부착된 LED 패널이 동시에 점등되며 붉은색과 파란색, 흰색의 파도를 만들었다. 그 순간 경기장은 거대한 빛의 바다로 변했다. 한동안 종이 피켓이나 휴대폰 불빛으로 이어져온 카드섹션 문화가 '빛의 응원'으로 진화하는 장면이었다.
이번 LED 카드섹션은 본부석 맞은편 구역에 시범적으로 설치됐다. 기자가 현장에서 확인한 장비는 각 좌석의 등받이 뒤편에 금속 지지대를 이용해 고정돼 있었다. 정사각형 형태의 패널은 하단에 전원선과 통신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고,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모듈이 구역별로 다른 색상을 내며 패턴을 만들었다. 경기 시작 전부터 은은히 점등되던 패널들은 국가연주와 함께 한꺼번에 색을 바꾸며 갖가지 정보를 전하고 응원을 유도했다. 관중이 손을 들지 않아도 좌석 자체가 하나의 응원 수단이 된 셈이었다.
빛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흰색에서 붉은색, 다시 파란색으로 바뀌는 과정은 매우 빠르고 정밀했다. 마치 무대 조명처럼 구역별로 정교하게 조율된 색의 흐름이 이어졌다. 전광판의 영상 연출과 달리, 이 빛은 관중석에서 직접 뿜어져 나왔다. 수많은 좌석이 하나의 제어 신호에 따라 움직이며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반응했다. 조명 효과에 익숙한 팬들도 "좌석이 살아 움직인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던 경기 당일에도 장비는 안정적으로 작동했고, 전원선은 방수 처리가 되어 있었다. 관중이 장비에 손을 대거나 조작할 필요 없이 자동으로 점등되는 구조였다.
 | 02 | 0 | 경기 시작 전 점등된 LED 카드섹션 문구 'FROM 차범근 TO 손흥민'. A매치 출장 신기록을 달성한 손흥민을 향해, 선배 차범근이 직접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며 세대의 바통을 잇는 순간이 연출됐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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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월드컵경기장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종이 카드섹션으로 '꿈은 이루어진다'의 거대한 글자를 완성했던 상징적 공간이다. 20여 년이 지나 다시 같은 구장에서, 그러나 완전히 다른 방식의 카드섹션이 구현되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그때는 사람들이 손으로 들었던 카드가, 이제는 좌석 자체에 장착된 전자 장치로 바뀌었다. 응원의 행위가 '손에서 빛으로' 옮겨간 것이다. 기술이 팬의 몸을 대신해 응원을 표현하는 시대, 상암의 이번 시도는 그 변화를 시각적으로 증명했다.
응원의 수단이 바뀌면 감정의 방식도 달라진다. 과거에는 관중이 직접 움직이며 목소리와 손짓으로 참여했다면, 이번 LED 카드섹션에서는 관중이 움직이지 않아도 응원이 완성된다. 기술이 대신 감정을 표현해주는 구조다. 그만큼 응원은 더욱 정교해지고, 동시에 자동화되었다. 관중 개개인이 아니라 좌석 단위로 색상이 제어되면서, 경기장은 거대한 픽셀의 집합체가 되었다. 붉은색과 파란색의 파동이 번갈아 번지며, 응원은 이제 시각적 경험으로 완성된다.
환경적인 변화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전처럼 종이 피켓을 대량으로 인쇄하고 폐기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비닐과 종이 대신 전자 장비를 활용하는 방식은 일회성 소모를 줄이고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지속가능한 응원문화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상암에서 시도된 이 장비가 향후 대표팀 경기나 프로축구, 대형 이벤트로 확대된다면, '친환경 응원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모델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있다.
 | 04 | 0 | 좌석마다 설치된 LED 장비 전경. 재사용 가능한 장비로 카드섹션을 구현해 종이 피켓 대신 친환경적 응원 방식을 시도한 상암의 새로운 실험.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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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 | 0 | 관중석 등받이 뒤편에 부착된 LED 패널 장치. 각 좌석에 설치된 패널이 자동으로 점등돼 색상을 바꾸며, 관중의 손 대신 기술이 응원의 패턴을 완성했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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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관중들은 장비의 존재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일부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이게 어떻게 작동되는 걸까"라는 반응을 보였고, 다른 이들은 불빛이 번질 때마다 환호를 보냈다. 기술이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응원의 에너지는 여전했다. 사람의 함성, 빛의 연출,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운 감정이 서로 겹쳐지며 경기장의 공기를 달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응원의 풍경이 디지털로 재편되는 현장이었다.
빛이 꺼진 뒤에도 그 여운은 오래 남았다. 관중들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좌석 뒤편에 남아 있는 장비들은 마치 꺼진 촛불처럼 줄지어 있었다. 이제 그 자리에는 사람의 손이 아닌 기술의 흔적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응원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 빛을 함께 바라보며 환호했고, 기술은 단지 그 감정을 증폭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은 20여 년 전처럼, 또 한 번 시대의 변화를 품은 공간이 되었다. 응원의 방식이 바뀌었을 뿐, 그 중심에 있는 건 여전히 사람의 열기였다. 기술이 만든 빛의 물결 속에서, 한국 축구의 응원문화는 다시 한 걸음 진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