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진 연출 “한국 공연의 DNA, 이제 세계 무대와 직접 연결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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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바꾸었을 뿐인데 공연의 의미는 한층 넓어졌다. 제작사 ㈜나인진엔터테인먼트와 연출가 정구진은 이번 시도를 단순한 번역이나 서비스가 아니라, 'K-소극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세계 무대와 접속하려는 실험이라고 정의한다.
'행오버'는 기억을 잃은 남자가 호텔 객실에 고립된 채 아내 살해 용의자로 몰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공포 대신 유머를, 절망 대신 반전을 전면에 내세운 코믹 스릴러로, 긴장과 웃음의 리듬이 정교하게 교차한다. 2014년 초연 이후 대학로에서 장기 흥행을 이어온 작품으로, 이번 영어 버전은 단순히 대사를 옮긴 수준을 넘어 언어의 리듬과 뉘앙스를 다시 조율했다.
"왜 그게 궁금해?"라는 원문 대사는 "It's none of your business."로, "인생 상담까지 하실 건가요?"는 "Are you my mom or something now?"로 바뀌었다. 정구진 연출은 "영어 특유의 직설적인 어감이 장면의 리듬을 살리고, 유머를 더 명확하게 만든다"며 "대사 한 줄이 달라져도 무대의 긴장감이 바뀌기 때문에, 배우들의 신체 감각을 그대로 유지한 채 언어만 새로 입혔다"고 말했다. 이번 버전에는 한국어 공연 경험이 있는 배우들이 중심으로 참여해 원작의 결을 유지했으며, 향후 원어민 배우를 영입해 완성도를 높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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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K-팝이 한국 음악의 브랜드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K-소극장이 한국 공연문화의 새 이름이 될 수 있다. 자막 없이 영어로 상연되는 오픈런 소극장 공연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대학로는 '한국의 브로드웨이'로 불릴 만큼 공연 인프라가 밀집돼 있지만, 그 무대가 해외 관객과 직접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외국인 관객은 자막이나 체험형 콘텐츠를 통해 한국 연극을 접해왔다. '행오버'의 영어 버전은 그 장벽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다.
그는 "언어가 바뀌었다고 해서 공연의 본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감정, 기억, 죄의식, 유머 같은 보편적 정서는 언어를 초월한다. 그 지점을 세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의 구상 속에서 'K-소극장'은 단순히 한 작품의 수출이 아니라, 대학로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지속 가능한 창작 생태계다. K-드라마와 K-팝이 각각 영상과 음악을 통해 전 세계로 확장했다면, 연극은 배우의 호흡과 관객의 현장성을 무기로 삼아 '공연 수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공연은 매주 금요일 오후 1시에 열린다. 평일 낮 시간대의 상연은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인근 직장인과 유학생 등 다양한 관객층을 고려한 선택이다. 대학로의 오픈런 시스템이 영어로 구현된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꾸준히 회차를 이어가며 관객을 확장하는 이 '지속형 구조'는 이미 한국 공연 산업의 중요한 자산으로 평가된다. 정구진은 "대학로의 오픈런 시스템이야말로 한국 공연의 DNA다. 이번 영어 공연은 그 구조가 세계로 향하는 첫 실험"이라고 말했다.
그의 구상은 무대 밖으로 이어진다. 그는 현재 'K-STAGE UP'이라는 글로벌 공연 유통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대학로의 현장을 넘어 시스템으로 확장되는 실험이다. 한국 창작극의 영어화와 자막화, 해외 투어 매칭 등을 지원해 소극장들이 실질적으로 해외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정구진은 "대학로의 많은 작품들이 훌륭하지만 언어 문제와 마케팅 채널 부재로 세계 시장에 닿지 못하고 있다"며 "K-STAGE UP은 그 벽을 허무는 첫 단추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플랫폼은 단순히 작품 수출을 넘어, 한국 공연 생태계 전체를 해외와 연결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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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달라지면 배우의 호흡과 장면의 리듬도 달라진다. 같은 장면이라도 대사와 호흡의 균형이 미묘하게 재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오버'의 긴장감과 유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는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감정의 재구성이다. 배우들이 말하는 언어가 달라졌지만 객석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영어권 관객은 대사의 유머에 웃고, 한국 관객은 상황의 리듬에 반응한다. 정구진은 "한국 관객에게 익숙한 장면을 외국 관객이 이해할 때, 그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며 "이런 교감이 쌓이면 한국 연극의 보편성이 증명될 것"이라고 말했다.
'행오버'의 영어 버전은 현재 12월까지 공연 일정이 확정되어 있으며, 관객 반응에 따라 내년에는 회차 확대와 전용 공연장 설립도 검토 중이다. 그는 "이번 공연은 한국 창작극이 세계 무대와 직접 만나는 첫 실험이자, 산업화의 시작"이라며 "소극장은 대형 공연이 채울 수 없는 밀도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 이 무대가 세계의 골목극장들과 교류하며 'K-소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지금 '행오버'의 무대는 K-팝의 스피커처럼 크지도, K-드라마의 화면처럼 넓지도 않다. 그러나 그 작은 공간 안에서 배우의 목소리는 영어로 한국의 감정을 말하고 있다. 언어를 바꾼 무대는 결국 한국 연극이 세계와 대화하기 위한 첫 문장이다. 그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우리는 또 하나의 K-컬처가 태어나는 장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