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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공산주의는 함께 붕괴됐다. 세계화가 찾아왔고, 지구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레드 콤플렉스는 어른들의 케케묵은 이야기로 여겨졌다.
철 지난 레드 콤플렉스는 2025년 서울 거리에서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청년들은 반공을 외치며 우리나라가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을지 모른다고 소리 치며 출처를 알 수 없는 반공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청년의 입을 통해 되살아 나 옛날옛적 색깔론을 조장하고 있다.
과거 반공주의와 비교해 딱 하나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 대상이다. '피곤한 이웃'이 된 북한의 빈 자리는 세계 패권국으로 성장한 중국이 채웠다. 철 지난 반공주의를 부르짖는 이들은 중국과 중국인을 겨냥해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최대 위협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현대판 '매카시즘'이 중국을 새로운 타깃으로 만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표현 방식이다. 일부 단체들은 '혐오'를 자신들의 주장을 점철시킬 수단으로 활용한다. 혐오 집회를 조직하고, 모욕적인 발언과 구호를 서슴지 않는다. 경제 불안과 정치·사회적 불만의 원인은 모두 '중국인'으로 귀결된다. 수백년 전 '마녀사냥'의 재림이다. 진화 작업에 나서야 할 정치권은 이를 '지지층 결집'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며 더욱 불을 지피고 있다. 선동·동조에 그치지 않고 당론·법안 발의에까지 미치면서 혐오가 공론장에서도 조직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인간이 가장 쉽게 타인의 공감을 얻고,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이 '혐오'다.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불안과 두려움을 이끌어 내 단순하고 명확한 적을 만든다. 개인의 목소리로 힘을 낼 수 없으니 적대감을 이용해 공감대를 얻고, 집단을 형성해 머릿수로 억누르는 법을 택하는 것이다. 수십년 전 사라진 레드 콤플렉스를 끌어들이면서까지 실체 없는 적을 만드는 이유로 해석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구시대적인 반공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신문물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적극 활용되고 있다. 일부 단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주입시키기 위해 SNS를 이용하고, 이를 통해 '가짜 뉴스'는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중국인에게 우리 국민보다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거나 대통령 탄핵, 국가 전산망 화재의 배후에 중국이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악의적으로 조작된 거짓 정보는 대중을 현혹시키고 무분별한 증오를 부추길 뿐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둔 지금,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시험대에 올랐다.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외교 무대로까지 철 지난 혐오 담론이 확장되는 모습은 우려스럽다. 다양성과 관용, 이성을 지키기 위한 시민사회의 자성과 책임이 필요하다. 국가를 위한 근본적인 이익이 무엇일지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