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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연의 오페라산책]국립오페라단 초연 오페라 ‘화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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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25. 10. 30. 08:22

봄날의 풍경 속에 펼쳐진 서글픈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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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화전가' 중 한 장면. /국립오페라단
이 오페라를 봄에 보았다면 좀 더 좋았을 것이다. 오페라 '화전가'는 봄꽃이 만개하고 청보리가 넘실대는 봄날의 풍경을 무대에 부려놓았다. 가을 한가운데에서 만났지만, 무대의 화사한 기운은 금세 4월의 어느 봄날로 객석을 이끌었다. 2020년 국립극장에서 연극으로 선보인 배삼식 극본의 '화전가'는 이번에 같은 작가의 대본과 최우정이 작곡한 음악을 통해 오페라로 거듭났다.

최우정은 우리 음악계에서 많은 관심을 끄는 작곡가다. 국악과 서양음악, 클래식과 대중음악,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과감히 시도해 온 그의 창작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인간에 관한 관심인 듯하다. 그 관심은 늘 음악과 극이 결합한 형태로 이어진다. 전작인 오페라 '달이 물로 걸어가듯'(2014), '1945'(2019)에서 최우정은 등장인물을 향한 연민이 가득 담긴 음악을 들려주었다.

'화전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 이 작품을 악극으로 불렀듯이, 최우정은 조성음악을 기반으로 한 이번 작품에서 그리스 비극과 오페라의 원형, 낭만주의 오페라의 전통에서 20세기 전반 우리 양악까지 종횡무진 넘나들며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펼쳐 보였다. 1막에서 우리 가곡 '보리피리', 동요 '겨울나무'의 선율이 빠르게 스쳐 지나고, 2막에서는 바흐의 '커피 칸타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불쑥 끼어들었다 사라졌다. 다채로운 배경을 가진 음악들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작곡가의 장기를 찾아보는 것도 특별한 재미였다. 이번 오페라는 경북 안동을 배경으로 했기에, 성악가들은 대사는 안동 사투리로, 노래는 주로 표준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안동 사투리 자체에 강한 억양과 음률이 배어 있어 때때로 노래보다 대사가 더 리드미컬한 음악처럼 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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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화전가' 중 한 장면. /국립오페라단
악극인지, 음악적 연극인지 조금 헷갈리는 순간마다 묵직하게 중심을 잡아준 것은 주인공 김씨 부인 역할의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이다. 이아경은 안정된 음정과 풍부한 성량을 바탕으로 9명의 뛰어난 여성 성악가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경상도 출신인 그가 구사하는 자연스러운 사투리는 언어의 뉘앙스가 매우 중요한 이 작품에서 든든한 길잡이처럼 느껴졌다. 김씨 부인이 노래하는 애이불비의 아리아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선율로 작동하면서 극장을 나설 때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됐다. 이아경은 시종일관 유연하고 흔들림 없이 노래했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연기로 객석에 큰 감동을 주었다.

대사에서 노래로, 노래에서 다시 대사로, 음악적 사인파가 그려질 때, 작품을 악극 혹은 21세기의 한국형 오페라로 만들고 싶다는 작곡가의 바람을 엿볼 수 있었다. 다만 성악가들에게는 무척 고된 작업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악구에서 진성과 성악적 발성이 수시로 교차하는 것은 매 순간 악기를 바꿔 연주하는 것과 같다. 많은 연습이 필요했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9명의 성악가들은 능숙하고도 아름다운 가창과 적극적인 연기력으로 각자가 맡은 역할의 개성을 잘 표현했다. 특히 둘째 며느리 영주댁 역할을 맡은 소프라노 김수정이 노래한 4막의 애달픈 아리에타는 그의 맑은 음색과 더불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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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화전가' 중 한 장면. /국립오페라단
송안훈이 지휘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변화무쌍한 음악적 분위기와 아코디언 등 독특한 악기와의 어울림도 매끄럽게 잘 소화했다. 그러나 음악적인 흐름에만 몰두하기보다 무대 위 성악가들과의 호흡을 여유롭게 살렸으면 좋았을 순간이 몇 차례 있었다. 또한 4막에서 홍다리 역할의 소프라노 양제경이 부른 대중가요는 특유의 리듬과 맛을 살려 다른 부분과 차별화했으면 성악가의 노래가 더욱 살아났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친족 혹은 가족 관계인 9명의 여성 출연진으로만 구성된 이 오페라는 마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프랑스 뮤지컬 영화 '8인의 여인들'처럼 희극적이다가도 풀랑크의 오페라 '카르멜 수녀들의 대화'에 나타난 비극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을 1950년 4월이라 못 박은 것은 우리에게는 커다란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어머니의 환갑을 맞아 즐겼던 이날의 찬란한 화전놀이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막과 막 사이에 낯설게 흐르던 암울하고 어두운 음악은 이들에게 닥쳐올 비극을 미리 알려주는 것만 같다. 디자이너 김영진이 맡은 한복은 출연진 모두를 한 송이 봄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형형색색의 한복 빛깔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불과 두 달 뒤면 닥칠 불행의 무게는 더 크게 다가왔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단국대 교수

손수연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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