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칼럼] 중국문명에는 왜 체계적 지식, 즉 학문의 전통이 없을까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51119010009755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5. 11. 20. 18:11

-중국에서는 '정의' 등을 주제로 끝없이 문답하는 플라톤의 대화편 같은 텍스트 없어
-正名 주장하는 '논어'에도 애매모호한 문장 너무 많고,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가 아니고 공자 한 사람의 '독백'
-중국문명의 꽃은 철학이나 과학이 아니라 "언외의 뜻"을 중시하는 시(詩)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너무 빨리 내뱉으면서 대화를 포기하고 철학과 학문을 포기

2025102901002017100120231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학문'은 말을 떠나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말을 얼마나 철저하게 잘 사용하는가에 따라 학문의 수준이 결정된다.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엄밀하게 규정하고, 단어와 단어의 관계, 문장과 문장의 관계를 전후좌우로 철저하게 따져 그것들을 논리정연하게 정렬하는 가운데 새로운 학문이 탄생하고 성장한다.

인문사회과학만 그런 게 아니다. 자연과학도 마찬가지다. 근대에는 수학이 자연과학의 언어가 되다시피 했는데 수학의 각종 기호들 또한 말의 일종이다. 자연과학에 필수적인 실험도 말없이 진행될 수는 없다. 실험의 목적도, 실험의 과정과 결과도 모두 말 혹은 수식에 의해 통제된다. 그렇다면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가릴 것 없이 모든 학문은 진지하고 논리적인 "말장난(language game)"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공자 이래 중국인들은 말을 대충 대충 사용해왔다. 노자의 '도덕경'이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애매모호한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 책은 "말할 수 있는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다"라는 구절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을 바르게 해야 한다"(正名)고 주장하는 공자의 '논어'에도 지혜롭지만 애매모호한 문장이 너무 많다. 막스 베버는 '논어'를 읽고 "인디안 추장의 말과 같다"고 했다.

학문의 기반이 되는 인간의 사유는 말을 떠나서는 성립하지 않으므로 "말장난"을 함에 있어 치밀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사유의 치밀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근대 이전 중국의 지식인들은 단어의 뜻을 엄밀하게 규정하고 문장을 논리적으로 다듬어 지식을 쌓아나가는 작업을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혐오스러운 일로 여겼다. 맹자는 말한다. "지식을 미워하는 것은 천착하기 때문이다."(所惡於智者爲其鑿也)

천착하기를 혐오한다면 시는 쓸 수 있어도 체계적 지식으로서의 학문은 안 된다. 실제로 중국문명의 꽃은 철학이나 과학이 아니라 말과 침묵 사이쯤에 자리 잡고 있어 "언외의 뜻"을 중시하는 시(詩)였다. 중국의 학자들은 모두 시인이었다. 중국의 잘 지어진 산문은 하나같이 시를 닮으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논리정연하게 말하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천착이 없이 대충 말하고 대충 생각하는 게 더 좋다.

대충 말하고 대충 생각하는 중국인들의 버릇은 공자와 맹자 이후 전통 시대 내내 계속된다. 그 원인이 뭘까. 사회적으로 보면 묻고 답하는 대화 전통의 부재가 궁극적 원인일 수 있다. 대화는 말싸움이다. 말싸움에서 이기려면 말꼬투리를 잡히지 않아야 한다. 말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면 말의 사용에 철저해야 한다. 고대 희랍에서는 그런 말싸움의 전통 속에서 민주적 시민사회와 법문화가 발달하는 한편, 철학과 학문이 고도로 발달했다.

하지만 중국적 사유의 전통 속에서는 정의라든가 용기와 같은 주제를 놓고 밑도 끝도 없이 문답을 주고받는 플라톤의 대화편과 같은 텍스트가 전혀 찾아지지 않는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가 아니고 공자 한 사람의 독백이다. '맹자'도 맹자 한 사람의 독백이고, '장자'도 장자 한 사람의 독백이다.

천여 년 뒤 주자와 그 제자들의 문답을 분류해서 모아놓은 방대한 규모의 '주자어류'에도 대화는 없고 스승이신 주자 한 사람의 일방적인 독백만 있다. 이 책에서는 세 차례 넘게 주고받는 문답이 거의 없다. 제자가 스승에게 자꾸 따지면 "남다른 설을 세워 이기기를 좋아한다"는 핀잔을 들어야 한다. 스승은 "공부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스승의 일방적 가르침만 있고 대화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스승 한 사람의 독백만 허용되고 대화 즉 말싸움이 허용되지 않는 중국적 전통의 뿌리에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각기 다른 자기주장들을 용납하지 않는 강한 공동체적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개인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고 대화를 허용하지 않다가 보면, 사회적 위계질서는 쉽게 잡히지만, 말의 철저한 사용은 중시되지 않고, 그러다보면 사유가 엉성해지고, 결국 철학과 과학의 미발달을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중국어는 영어와 같은 굴절어(inflectional language)와는 달리 성, 수, 격이 없고 시제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접속사와 종속절이 발달하지 못한 비굴절어(isolating language)이기 때문에 치밀한 논리적 사유의 발달에는 많이 불리하다는 점도 물론 중요하다. 서양문명에서는 고대희랍 이래 문법학의 기초 위에 논리학이 성립하지만 중국문명에는 애당초 문법학이 없었고 따라서 논리학도 없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한문을 배울 때 문법부터 배우는 일은 전혀 없었다. 문법의 부재는 논리의 부재를 낳아 문장의 앞뒤를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따지는 일도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어 문법은 19세기말 서양어 문법을 흉내 내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중국어가 가진 그런 언어적 특징이 중국인들의 사유를 결정적으로 제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00년 전 중국인들은 치밀한 사유 위에 전개되는 인도불교를 수입해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익혀나갔다. 그 결과, 엄청난 규모의 《팔만대장경》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역 불교경전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읽어도 헷갈리고 골치가 아플 뿐, 깨달음에 이르기는 힘들었다. 바로 이런 고민이 불교의 중국화를 낳는 결정적 계기였을지 모른다.

불교의 중국화는 불교수입과 동시에 시작되었지만 인도불교가 가진 치밀한 "말장난"과 치밀한 사유를 포기하면서 완성된다. 불교의 중국화로 인해 최종적으로 남게 된 두 종파는 염불 위주의 기복종교인 정토종, 그리고 독서와 사색을 거부하고 참선만 하자는 선종이다. 이 두 종파가 추구하는 염불과 참선은 둘 다 대화의 포기, 말의 포기, 사유의 포기, 학문의 포기를 출발점으로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 유사성을 갖는다.

중국불교사를 보면 송대 이후 상층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고, 민간의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정토종이 유행하게 된다. 이제 중국불교는 인도불교의 치밀한 언어와 치밀한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대화 전통의 부재 위에서 대충 말하고 대충 생각하는 중국적 사유의 전통으로 완전히 복귀한 셈이 된다.

걸핏하면 "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대화를 중단해버리는 노장의 도가, 느닷없이 재치 있는 말 한 마디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위진 시대의 청담(淸談)은 선불교의 선구들로서 대화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다. 선불교의 이른바 화두(話頭)는 대화와 논변의 진행을 대놓고 원천 차단하기 위한 장치다. 깨달음이 대화와 논변의 부정 위에서만 가능하다면 깨달음이야말로 철학과 학문에 대한 최대의 적이다.

대화와 논변, 철학과 학문이 우리를 구원해주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죄다 말에 얽매여 있는 세속적인 것들이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내뱉고 대화와 논변의 장을 서둘러 떠난다고 해서 우리가 정신적으로 심오해진다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 말의 차원을 넘어선 침묵의 차원 속에 정신적 심오함이 있다 해도 말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사용해보지도 못한 채 침묵으로 후퇴하면 말의 어지러운 잔상이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철학자 김형효(1940-2018)는 21세기 우리에게 남은 일은 "과학과 명상"이라 말한 적 있다. 과학은 물질적 편익을 주고 명상은 정신적 깊이를 준다. 둘은 정반대이지만 둘 다 우리를 이롭게 한다. 하지만 중국인들처럼 대충 말하고 대충 생각하면 과학을 놓치게 되고, 너무 빨리 "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침묵으로 후퇴하면 명상을 놓치게 된다.

중국문명에는 서양문명에서 볼 수 있는 논리정연한 "말장난"이 없다. 또한 중국문명에는 인도문명에서 볼 수 있는 말의 철저한 포기 즉 심오한 명상을 보기 어렵다. 중국 선승들의 참선수행은 깨달았다는 소리만 요란할 뿐 인도 수행자들의 수행만큼 치열하지도 못했고 치밀하지도 못했다. 그건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너무 빨리 내뱉으면서 대화를 포기하고 철학과 학문을 포기한 탓인지도 모른다.

중국은 1919년 5.4운동을 기점으로 "전면적 서구화"의 길로 들어섰다. 중국은 한대 이후 유교문명을 헌신짝 버리듯 내동댕이치고 마치 스폰지처럼 서양문명을 흡수했다. 특히 서양 근대의 과학기술문명에는 가히 열광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과연 서양문명을 제대로 받아들여 자기화할 수 있을까. 중국이 과연 서양문명을 성공적으로 자기화한 다음 그 서양문명을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중국은 이미 자신의 전통을 다 내팽개쳤지만 여전히 서양과는 말이 다르고 말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중국은 대충 말하고 대충 생각하는 버릇을 과연 얼마만큼 내팽개친 것일까. 오늘날의 중국은 1000년 전 인도불교를 다 내버리듯이 서양문명을 다 내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대화와 토론을 거부하는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사고방식만큼은 충실하게 되살아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모택동 이후 중국대륙의 공산정권은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대화와 토론을 거부하는 중국적 사유의 전통을 충실하게 되살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런 전통을 폭력으로 강요해 왔다. 왕조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전체주의적 독재의 연속이었다. 이것은 5·4운동 이후 본격화된 근대화 즉 서구화의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개인의 자유 그리고 대화와 토론에 의거하고 있는 근대화, 즉 서구화의 흐름에 역행한다면 중국의 미래가 어두울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미래가 어둡다. '중국식 근대화'는 없다. 오직 '서구식 근대화'만 있다는 것을 중국은 잊지 말아야 한다. 중국은 '중국식'을 고집하는 중화주의적 오만을 철저히 벗어던질 때 세계사의 괴물이 되기를 멈추면서 자신의 미래를 열고 세계문명사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