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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존 F. 케네디(JFK): 신선한 바람의 리더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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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2. 0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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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정치는 조직이다. 아니 정치는 바람이다. 존 F. 케네디는 바람, 그것도 신선한 바람이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국제정치와 정치사상에 중점을 둔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는 특히 고대와 근대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홉스, 로크, 그리고 루소에 심취했다. 그리하여 그는 정치철학에 치밀한 토대를 갖고 있었다. 그는 성적에서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많은 독서를 하고 있었다. 그의 독서목록은 해밀턴 암스트롱, 찰스 비어드, A.D. 린드세이 등을 포함했다. 그는 무솔리니의 전기를 읽었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도 읽었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가 1937년 12월 9일 저명한 기업인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부친 조셉 케네디(Josep Kennedy)가 주영 미국대사가 되었다. 그는 형인 조셉 2세와 함께 잠시 런던의 미국 대사관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당시 워싱턴으로 보낸 조셉 케네디 대사의 친(親)체임벌린 외교 공문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눈 밖에 났다. 그사이에 유럽의 사건들을 면밀하게 추적하던 존 케네디는 리더십에 대한 자신의 안목을 형성한 대학 졸업논문의 주제를 발견했다.

자기 아버지와는 달리 존 케네디는 체임벌린과 그의 전임자 스텐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의 유화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사실상 윈스턴 처칠이 그의 롤 모델이었다. '뮌헨에서 유화정책: 군비축소 정책으로 변하는 느린 영국 민주주의 필연적 결과'라는 케네디의 졸업논문 주제는 그 또래 나이의 사람들에게는 보기 어려운 비상한 역사적 및 정치적 세련미를 보여주었다.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한 그의 아버지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친구 아서 크록(Arthur Krock)에게 전화를 걸어 케네디가 1940년에 출판을 위해 그 논문을 수정할 수 있도록 돕게 했다. 그 결과물이 '왜 영국이 잠들었나?(Why England Slept?)'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 제목은 크록이 책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윈스턴 처칠의 1938년 '영국이 잠든 사이에(While England Slept)'라는 책의 제목을 원용해 제안한 것이었다.

존 케네디는 이 책의 출간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40년 6월에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1941년 9월 그는 아버지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해군 소령으로 임관하여 워싱턴 D.C.에 있는 해군정보국의 해외정보과에 배치되었다. 그는 다시 시카고에 있는 노스웨스턴대학교에 있는 장교 후보생학교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훈련을 받던 중 케네디는 순찰 어뢰선 피티(PT)에 매혹되었다. 그후 1943년 그는 1월 남태평양에 있는 솔로몬 제도로 다시 전보되었고, 4월에 해군은 그를 PT-109에 배치했다. 7월 말에 그와 그의 승조원들은 뉴기니에서 보급품과 병사들을 수송하는 일본의 어뢰정들을 막는 노력에 합류했다. 8월 2일 이른 아침에 다른 PT선(船)들과 같이 케네디의 PT-109도 4척의 일본의 어뢰정에 맞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부분의 PT선들은 라디오가 장착되지 않아 아주 어두운 밤의 전투에선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일본의 어뢰정 아마기리(Amagiri)가 케네디의 작은 PT선을 들이받아 두 동강을 내버렸다. 두 명의 승조원이 즉사하고 한 명이 크게 부상했다. 케네디가 부상자를 끌고 생존자들은 4시간을 헤엄쳐서 가까운 섬으로 갔다. 8월 4일 케네디는 도움을 찾아 다른 섬으로 부하들을 이동시켰다. 그는 두 명의 원주민을 만나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PT선들이 도착하여 케네디와 그의 승조원들을 구명했다. 그리고 케네디는 태평양에서 전쟁영웅으로 언론에 등장했다.

케네디는 퇴역 후에 언론 분야에서 실험하고 싶었다. 또다시 그는 아버지의 영향력 덕택에 허스트(Hearst) 신문사에 입사하여 1945년 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유엔회의(the United Nations Conference)를 취재할 수 있었다. 허스트 신문사는 그를 영국에 파견하여 영국선거를 취재하게 했다. 그는 제임스 포레스털(James Forrestal) 새 해군장관과 동행하여 포츠담 회담(the Potsdam Conference)을 취재할 수 있었다. 귀향 후 케네디는 매사추세츠의 하이아니스 포트(Hyannis Port)의 로타리 클럽(Rotary Club)에서 '영국과 독일: 승자와 패자'에 관한 주제로 연설을 했다. 그리고 케네디는 의회에 출마하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원래 정계 진출을 계획했던 그의 형 조셉 2세가 전쟁 중에 사망함으로써 원래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던 존 케네디를 그의 아버지가 의회에 출마하도록 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선에서 선거운동은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했다. 그는 아주 부자 아들로서 매사추세츠의 가장 빈곤한 구역에서 출마하고 있었다. 그는 400회가 넘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그는 '룩(Look)'이라는 잡지에 실린 한 기사에서 "나는 부자의 아들로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의무감이 있다"고 예선투표전에서 말했다. 그는 6월 예선에서 42%를 획득했으며 11월 선거에서 70% 이상의 지지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하원의원으로서 삶은 그에게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비록 산업조직회의(the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가 그에게 노동문제에 대한 투표에 만점을 주었지만, 케네디는 조작된 노동계에 무비판적이지 않았다. 그에게 특별히 거슬리는 것은 상당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미치는 공산주의 영향의 증거였다. 국내 공산주의의 위협을 분명하게 염려한 케네디는 하원 비(非)미국인활동위원회(the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 예산을 배정하는 데 찬성했다. 1951년 그는 두 번의 해외여행을 했다. 첫 번째는 유럽으로 가서 교황 피우스 12세(Pope Pius XII)를 알현하고 유고슬라비아의 수상인 티토 원수(Marhall Tito)를 만났다. 이스라엘, 이란, 인디아, 그리고 일본을 포함하는 중동과 아시아 국가들로 두 번째 여행을 계기로 전후 세계에서 미국의 지위에 대한 그의 견해가 비판적이 되고 있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의 사이공 방문이었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의 시골에서 월맹 게릴라 군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케네디는 도시 밖으로 여행할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 그의 여행은 그에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냉전의 헌신적 전사로 남아 있으면서도 미국이 아랍과 아시아 인민들의 부상하는 민족주의를 보다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존 케네디는 1952년 상원의원에 출마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막강한 현역의원인 공화당의 상원의원 헨리 캐봇 로지(Henry Cabot Lodge)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도 그의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은행가로서였다. 당시 미국은 여전히 한국전쟁을 치르는 중이었고 소련과 치열한 냉전 중이었다. 그의 선거 참모들은 거의 100만장에 달하는 PT-109 사건을 설명하는 팸플릿을 배포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그의 영웅적 행동을 계속 이용했다. 그리고 선거에서 인기 있는 현역의원에 대한 압도적인 승리로 유명인사로 상원에 취임했다. 그 명성을 1950년대 쭉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존 F. 케네디는 상원의원으로서 외교정책 문제들에 항상 보다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대학 학부 시절부터 외교정책 문제들에 관해 폭넓게 독서했다. 그는 1951년 두 번의 여행을 통해 유럽, 중동과 아시아에서 정치 외교 및 군사 지도들을 만났다. 케네디는 상원에서 외교 문제에 관한 토론이 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케네디는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뉴 룩(New Look)' 외교정책의 비판자가 되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접근법은 게릴라 투쟁이나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다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확실히 그는 공산주의는 하나라는 견해와 도미노 이론(the domino theory)을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아이젠하워 정부가 아시아,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급속하게 성장하는 반식민주의 감정에 너무나 관심이 적다고 주장했다. 1954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점점 더 희망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케네디는 그곳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점증하는 인기에 대해 유일한 생명력 있는 대안으로 더 많은 미국의 원조가 아니라 베트남인들의 독립을 선호했었다.

1954년 케네디는 '통일의 대가(the Price of Union)'라는 제목의 허버트 애가(Hurbert Agar)가 쓴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의 전기를 읽었다. 그 속에서 그는 자기 정당을 거역하는 용기 있는 한 상원의원을 발견했다. 그는 애덤스의 원칙적인 입장을 칭송했다. 그리고 그는 테드 소렌슨(Ted Sorenson)에게 다른 용기 있는 본보기가 될 상원의원들을 조사하도록 요청했다. 존 퀸시 애덤스를 포함하는 8명의 상원의원들이 정치적 용기의 본질을 설명하는 케네디의 시도를 대변했다. 그는 이것을 '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했다. 그 책은 1966년 1월에 출간되자마자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수개월간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은 가장 인상적이게도 1956년 퓰리처상 위원회에 의해 그해 최고의 전기로 선정되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의 첫 위성인 스푸트니크(Sputnik)를 발사했다. 소련의 선진화된 기술의 과시는 미국의 대중을 경악시켰다. 소련과 경쟁에서 실패한 미국의 과학에 대한 국가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스푸트니크는 존 케네디에게 은총이었다. 그것은 1960년 그의 성공적 대통령 출마를 가져오는 조건에 기여했다.

비록 미국이 소련에 대한 핵무기의 우월성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런 진정한 상태를 미국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않았다. 케네디는 '미사일 격차(the missile gap)'의 문제를 포착했다. 그리고 그의 연설에서 민주당이 백악관을 장악할 때가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0년대가 세계사에서 하나의 전환점, 즉 세계 힘의 균형이 결정적으로 소련에게 유리하게 이동할 시기라고 주장했다.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쇼크가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미사일 격차가 미국의 대중에게 쇼크가 되길 희망했다. 미국의 군사적 지위에 대한 염려가 미국을 통일과 희생으로 이끌기를 그는 희망했다. 존 케네디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국을 취약하게 남겨두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젊은 후보자는 1944년 성공적인 D-Day 작전을 이끌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5성 장군이 더 이상 미국을 효과적으로 이끌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새로운 지도자들이 필요했다.

1960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과 민주당의 존 F. 케네디의 대결이었다. 두 대통령 후보는 비교적 젊었다. 이런 사실은 최근 과거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그리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같은 노령의 대통령들과 현저히 대조되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케네디는 선거운동 중 세대교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민주당 전당대회의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선거운동의 기조를 정했다. 그는 "뉴 프런티어 정신"을 제시했다. (계속)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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