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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8일(현지시간) "필리핀의 자연재해는 부패·안일함·기후 혼란이 결합해 만들어낸 인재"라고 보도했다.
유명 관광지인 필리핀 세부의 참상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곳 주민들은 지난달 발생한 지진으로 집을 잃은 데 이어 태풍 '갈매기'와 '풍웡'이 연달아 덮치면서 생존의 기로에 섰다. 이재민들은 무너진 집터 위에서 얇은 방수포 한 장으로 비바람을 견디고 있다.
현장 구호 활동가인 메이포스 루네타는 "예전엔 1년에 한두 번 오던 강력한 태풍이 이제는 일주일에 세 번씩 몰아친다"며 "구호 활동을 위한 복구 시간조차 없이 다음 재난이 닥치는 것이 '뉴 노멀'이 됐다"고 토로했다. 베테랑 구호 요원들조차 "세부의 파괴 규모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수준"이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다.
실제로 올해 필리핀은 5주 동안 6개의 태풍이 연쇄적으로 강타하는 기이한 기상 패턴을 보였다.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등 연구진은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기후변화가 태풍의 풍속과 강우량을 증폭시켜 재난의 파괴력을 키웠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필리핀 내부 시스템의 붕괴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재난이 '피할 수 없는 천재(天災)'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벤 파올로 발렌수엘라 싱가포르 경영대 연구원은 "우리는 재난에 대비해 웅크리고 얻어맞을 준비만 할 뿐, 피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그는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토지 이용 계획이 부재한 탓에, 홍수나 산사태 위험 지역에 주거지와 인프라가 무분별하게 들어서면서 피해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고질적인 '부패'가 상황을 악화시켰다. 필리핀에서는 홍수 통제 프로젝트와 관련해 정치인과 건설업자가 결탁해 부실 공사를 하거나,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 프로젝트'에 예산을 집행하는 스캔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22년 집권한 마르코스 주니어 정부가 치수(治水) 사업에 5450억 페소(13조 5705억 원)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었음에도, 수도 메트로 마닐라는 올해도 어김없이 물에 잠겼다. 발렌수엘라 연구원은 "도둑맞은 1페소의 비용은 수백, 수천 배의 재난 피해와 인명 손실로 돌아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과학적 방재 시스템을 정착시킬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는 비판도 나온다. 필리핀은 2012년 첨단 기술을 활용한 재난 경보 시스템인 '프로젝트 노아'를 도입해 성과를 냈으나, 2017년 예산 삭감을 이유로 사실상 중단시켰다. 당시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마하르 라그마이 필리핀대 교수는 "일본이 철저한 도시 계획과 자원 투입으로 '위험'을 관리해 피해를 줄이는 것과 달리, 필리핀은 역량을 키울 기회조차 잃어버렸다"고 한탄했다.
결국 기후 위기라는 외부적 요인과 부패·무능이라는 내부적 요인이 맞물리면서 필리핀 국민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리고 있다. 발렌수엘라 연구원은 "대만·일본·싱가포르가 재난 방지를 국가 핵심 인프라로 다루는 것과 달리, 필리핀은 땜질식 처방에 그치고 있다"며 "인프라가 계속해서 우리를 배신하는 한, 우리는 매번 맨몸으로 재난과 싸워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