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뜬,구름이 묻는 공존의 조건과 타자화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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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지금 다시 호출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베니스의 상인'이 다루는 세계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16세기 상업 도시 베니스는 공정과 상식이 지배하는 곳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종교와 출신, 신분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손쉽게 구분되는 사회였다. 극단 '뜬, 구름'은 이 고전적 배경을 오늘의 한국 사회와 포개어 놓는다. 이념과 지역, 성별과 종교, 출신의 차이가 일상적인 갈등의 언어로 소비되는 지금, 베니스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은유로 기능한다.
전통적으로 '베니스의 상인'은 착한 기독교인 안토니오와 탐욕스러운 유대인 샤일록의 대립으로 읽혀왔다. 권선징악의 틀 속에서 샤일록은 패배하고, 사회는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그러나 극단의 시선은 이 도식에 머물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가 아니라, 누가 규칙을 만들고 누가 그 규칙의 바깥으로 밀려나는가다. 샤일록은 개인적 악인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자화된 끝에 분노로 밀려난 존재다.
작품의 핵심 장면인 재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계약이라는 문서는 공정의 상징처럼 제시되지만, 해석의 권한은 언제나 권력자에게 있다. 포셔는 법학박사로 위장해 법정을 장악하고, 계약의 문구를 자의적으로 확장하며 판결을 이끈다. '살 1파운드'라는 문장은 문자 그대로 집행될 수 없는 조건임에도,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보다 배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 재판은 법이 정의의 최종 보루라는 믿음에 균열을 낸다. 공정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언어일 수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자비'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관대함을 강조하며 샤일록에게 자비를 강요한다. 그러나 그 자비는 개종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 정체성을 포기하라는 요구, 존재 자체를 부정하라는 압박이다. 사랑과 연민이 내부자에게만 허용되는 순간, 자비는 폭력이 된다. 극단 '뜬, 구름'은 이 장면을 통해 사랑과 정의라는 말이 어떻게 배제의 도구로 변질되는지를 차분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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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제시카는 여성이자 유대인이라는 이중의 타자 위치에 놓여 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를 부정하고, 개종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감행한다. 특권과 개척이라는 두 갈래의 길은 서로 다른 선택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마지막에서 둘 다 완전한 해방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교차한다.
음악과 무대 언어는 이 대비를 감각적으로 확장한다. 포셔의 세계는 살롱파티처럼 가볍고 유희적인 리듬으로 소비되는 반면, 제시카의 시간은 침묵과 긴장 속에서 흐른다. 재즈와 스윙, 라이브 노래는 관객의 몸을 흔들지만, 그 리듬은 곧 불편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키치적인 표현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통속과 고급이라는 위계 자체를 흔드는 저항의 방식이다. 웃음과 경쾌함 뒤에 남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차별을 일상의 언어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자각이다.
이러한 무대 언어는 극단의 창작 경향과도 맞닿아 있다. 극단 뜬, 구름은 '사천의 선인', '외투', '판다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릴 수 없다', '도시늘보 표류기' 등을 통해 욕망과 구조, 공존의 문제를 꾸준히 탐구해왔다. 고전을 호출하되 현재의 언어로 번역하고, 관객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질문을 공유하는 방식은 이번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유효하다.
이번 앙코르 공연이 갖는 의미는 여기에서 확장된다. 밀양공연예술축제 초청을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은 이후 다시 서울 관객을 만나는 이 무대는, 고전이 어떻게 동시대의 사회적 언어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16세기 베니스는 더 이상 먼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한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공존을 잃은 사회는 결국 타자화를 반복할 뿐이라는 메시지는, 연말이라는 시기와 맞물려 더욱 선명해진다.
'베니스의 상인'은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공정하다고 믿어왔는가. 그 공정은 누구에게 열려 있었고, 누구를 배제해왔는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규칙의 정교함이나 처벌의 명확성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려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여행자극장에서 펼쳐질 이 90분의 시간은, 관객 각자가 자신의 저울을 다시 꺼내 들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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