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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대로] 美 연방대법원의 트럼프 관세 판결이 보여준 ‘사법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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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2. 22. 17:27

김이석고문
김이석 논설고문
2026년 2월 20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은 전 세계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 판결은 대통령의 강력한 정책 의지를, 그것도 자신이 지명한 대법관들이 포함된 재판부가 헌법 위반으로 막아섰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전 세계에 '상호관세'와 펜타닐·이민 관련 관세를 부과할 때 전 세계가 놀랐다면, 이를 연방대법원이 6 대 3으로 위헌이라고 선언할 때 다시 놀랐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필두로 진보 성향 대법관 3명과 트럼프 본인이 직접 임명한 닐 고서치·에이미 코니 배럿 보수 대법관이 함께 다수인 '위헌' 의견을 냈다. 이 결정으로 이미 징수된 수백억 달러 규모의 관세에 대해 기업과 수입업자들이 환급을 청구할 수 있는 소송의 문이 열리면서 '트럼프 관세 정책의 다음 행보'에 시선이 쏠리고 있지만, 진짜 배워야 할 점은 미국 사법부의 독립성이 아닐까.

대법원은 헌법 제1조 제8항이 명시한 의회의 독점적 과세권·관세권을 근거로 "IEEPA는 대통령에게 관세를 부과할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대통령이 의회의 헌법적 영역을 침범한 행위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는 권력 분립 원칙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판결 직후 "반미적이고 터무니없는 결정"이라며 대법관들을 공개 비난했지만, 즉시 무역법 122조를 발동해 새로운 10% 글로벌 관세(최대 15% 인상 가능)를 부과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미 연방대법원의 독립성 유지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 연방헌법 제3조 제1항은 연방 판사들에게 "좋은 행위 동안 그 직을 유지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실질적인 종신제를 의미한다. 판사가 스스로 사임하거나 은퇴하거나, 아니면 매우 중대한 범죄(고위범죄·중죄)로 탄핵받지 않는 한, 평생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아무 문제 없이 성실하게 일하는 한, 누구도 강제로 내쫓을 수 없다"는 헌법적 보장이다. 실제로 미국 건국 이후 200년 넘게 대법관이 탄핵으로 쫓겨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종신제의 핵심 목적은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완전한 차단이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연방주의자 논문'에서 "사법부는 가장 약한(least dangerous) 부서"라면서도 "종신제 없이는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임기가 정해져 있거나 재임명·재선거를 걱정해야 한다면 판사는 다음 선거나 정치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 순간부터 법과 헌법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 앞서기 쉽다. 종신제는 판사가 이런 계산 없이 오직 법 앞에 서게 만드는 장치다. 여기에 급여 감액 금지 조항까지 더해져, 권력자가 월급을 무기로 압박하는 길도 차단했다.

미국 사법부 독립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시험대는 1937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대법관 증원 계획이었다. 뉴딜 정책을 연이어 위헌 판결한 보수 대법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70세 이상 대법관 1명당 추가 1명을 임명해 총 15명으로 늘리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다. 여당 내 반발, 여론 반대, 대법원장 휴즈의 반박 서한 등이 겹쳤고, 결국 상원은 증원 조항을 삭제했다. 이 사건 이후 미국 사회는 "사법부를 정치적으로 길들이려는 시도는 역효과를 낳는다"는 강력한 관습을 만들었다. 150년 넘게 대법원 정원 9명은 흔들리지 않는 규범이 됐다. 스트롱맨 트럼프조차 연방대법관 증원은 발상조차 할 수 없는 이유다.

연방대법관들의 헌법에 충실하게 판결하려는 확고한 실천 의지 역시 과소평가돼서는 안 된다. 뉴딜 정책 가운데 사유재산권 침해 소지가 가장 컸던 법안은 1934년 농장파산법(Frazier-Lemke Farm Bankruptcy Act)이었다. 대공황으로 농장이 경매 직전에 몰린 농민들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이 법은 기존 모기지(저당) 채권자들의 권리를 극도로 제한했다. 농민이 파산 신청만 하면 채권자는 즉시 경매를 할 수 없고, 법원이 농장 가치를 낮게 평가한 뒤 농민은 5년간 농장을 계속 사용하면서 그 낮은 가격으로만 빚을 갚으면 됐다. 이는 채권자들의 저당권이란 사유재산을 정부가 빼앗아 농민에게 넘겨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방대법원은 1935년 만장일치(9 대 0)로 이 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Louisville Joint Stock Land Bank v. Radford 사건). 헌법의 적법한 절차 조항과 정당한 보상 조항을 핵심 근거로 삼아 이 법이 "정부가 사유재산을 공공목적으로 수용할 때는 반드시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어겼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대공황이라는 위기 상황이라고 해서 헌법을 무시할 수 없다. 채권자들의 재산권이 정치적 편의로 희생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는 뉴딜 초기 대법원이 재산권 보호에 얼마나 철저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반면 대한민국 사법부는 아직 이런 독립의 전통을 갖추지 못했다. 대법관 임명 과정에서 행정부 영향력이 크고, 6년 단임제는 교체 용이성이 두드러진다. 정권 교체기마다 사법 논란이 반복되고, 판결이 정치적 해석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검찰·사법 갈등, 여론 재판, 임명 과정의 당파성 논란은 법의 지배를 약화시킨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칙이 정치권력 앞에서 흔들리면, 국민의 자유와 재산이 위태로워진다.

미국이 250년 가까이 쌓아온 사법부 독립을 위한 노력에 우리도 주목해야 한다. 우선 종신제 같은 장기 임기 보장과 정치적 중립 등 헌법적 장치를 만들고, 정치권이 사법 개입 시도를 자제하는 관습을 만들어가야 하고, 또 사법부 스스로 윤리와 투명성을 강화하면서 정치권에 흔들리지 않는 판결을 쌓아가야 한다. 지금 국회에서 사법부와 관련해서 제안된 법안들 가운데 미국의 이러한 노력과 배치되는 것은 없는지 여당 스스로 잘 성찰해 보기 바란다.

김이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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