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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라는 설계, 침묵이라는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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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객원 기자

승인 : 2026. 03. 06. 08:00

[프리뷰] 연극 '자동 주행하는 투명버스'
13~15일 삼일로창고극장
밀폐된 공간에서 마주하는 '진정한 합의'에 대한 팽팽한 응시
포스터
공연 예술의 현장성은 언제나 찰나의 순간에 완성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약속과 설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움직임은 철저히 계산된 호흡의 결과물이어야 하며, 이는 곧 관객과의 보이지 않는 신뢰로 이어진다.

오는 13일부터 15일까지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관객을 만나는 이번 작품은 최근 공연계와 영상 산업 전반에서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를 전면에 내세워, 우리 시대의 합의와 욕망 그리고 그 경계에 놓인 침묵의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들 것으로 보인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성적 표현이나 신체 접촉이 수반되는 장면에서 배우의 동의를 확인하고 안전한 연출 환경을 조성하는 전문가다. 이미 북미와 유럽의 제작사들은 이를 선진적인 제작 환경을 위한 글로벌 표준으로 받아들이는 추세이며, 한국 역시 최근 일부 영화와 OTT 현장을 중심으로 시스템의 안착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 등장한 이 새로운 역할은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던 관행적 폭력과 무질서한 즉흥성에 엄중한 질문을 던질 것으로 기대된다.

극 중 주인공 아야이 유토는 신체를 센티미터 단위로 나누고 시간을 초 단위로 계산하며 모든 약속을 문서로 남기는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묘사된다. '거품도쿄'로 명성을 얻은 그가 일본 최대 AV 레이블인 S.A.D.의 수장 니가와라 치에를 만나며 벌어지는 갈등은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핵심 축이 될 전망이다.

"모든 것이 합의 위에서 움직인다"는 치에의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유토의 직업적 윤리와 맞닿아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시스템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침묵을 강요하는 교묘한 권력을 상징할 가능성이 크다. 유토가 촬영장에서 마주치는 신인 배우 유나의 존재는 서사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리허설 도중 발생한 예기치 못한 즉흥적 스킨십은 유토가 구축해온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된다. 유토가 촬영을 멈춰 세우는 그 찰나, 무대 위에는 정적이 흐르고 관객은 약속되지 않은 욕망이 타인의 영토를 침범할 때 발생하는 서늘한 긴장감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연습1
연극 '자동 주행하는 투명버스' 연습 장면 / 사진 극단 제공
연습2
연극 '자동 주행하는 투명버스' 연습 장면 / 사진 극단 제공
작품은 관객에게 묻는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정한 합의이며, 어디서부터가 가공된 즉흥인가. 신체가 소비의 대상이 되는 공간에서 배우의 존엄성이 과연 서류상의 합의만으로 온전하게 보호될 수 있는지는 이 작품이 객석에 던지는 가장 뼈아픈 화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히 특정 산업의 뒷이야기를 넘어,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가 타인의 영역을 얼마나 쉽게 간과해 왔는지를 성찰하게 할 기회를 제공한다. 권력 관계 속의 침묵이 일상이 된 현장에서 유토의 방식이 과연 승리할 수 있을지, 혹은 거대한 시스템 앞에 굴복하게 될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팽팽한 극적 긴장감을 유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배우들의 면면 또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황지훈은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유토 역을 맡아 지성적인 집요함을 입체적으로 구현할 예정이며, 강연화는 시스템의 냉혹함을 대변하는 치에 역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할 것으로 보인다. 수동적 객체에서 주체로 거듭나려는 유나 역의 이선, 그리고 김형건, 최훈재, 이중윤 등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이 각기 다른 입장에서 '동의'와 '침묵'의 다층적인 얼굴을 어떻게 그려낼지 주목된다.

삼일로창고극장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은 이번 작품의 주제 의식을 구현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무대와 객석의 가까운 거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단순한 관람객을 넘어, 촬영 현장의 은밀한 침묵을 방조하거나 혹은 감시하는 목격자의 위치에 서게 만들 수 있다. 실질적인 사회적 담론을 연극적 언어로 치환하여 대중의 지적 호기심과 정서적 공감을 동시에 자극하려는 영리한 시도가 무대 위에서 어떻게 꽃피울지 궁금해진다.

유토가 확인하고자 하는 동의의 경계는 무대 밖 우리 삶의 모습과도 닮아 있을 것이다. 타인의 몸과 마음을 대할 때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고통 섞인 인내를 담보로 한 것은 아니었는지, 연극은 시종일관 팽팽한 응시로 그 실체를 추적할 것으로 보인다. 연습실의 치열한 고민이 무대 위 압도적인 첫인상으로 피어나는 순간, 관객은 예술이 지닌 미학적 성취를 넘어선 날카로운 진실과 마주하게 될 수 있다. 관객들은 정교한 설계와 예측 불가능한 충돌 속에서 진정한 동의의 의미를 스스로 되묻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우리는 이미 유토가 설계한 거대한 질문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공연장 문을 연다는 것은 단순히 허구의 세계로 입장하는 것을 넘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치환되는 긴 여운의 시작이 될 것이다.

예술가의 철학이 관객의 일상과 맞닿는 그 치열한 접점에서, 이번 작품은 올 시즌 가장 도전적이고도 매혹적인 순간을 선사할 준비를 마쳤다. 무대 위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약속에 대해 다시금 깊이 성찰하게 될 것이다.
전형찬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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