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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선의 표전외교 속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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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3. 09.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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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종 전 카타르대사
어느 나라나 역사 속에 긍정적 면을 찾는 것은 후손의 몫이다. 이런 점에서는 훌륭한 자손이 훌륭한 조상을 만든다. 냉전학자 베스타(O.A. Westad)는 조선과 중국과의 600년 관계를 '의로움(Righteousness)'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그리고 한국인들 대부분이 유난히 정의롭거나 의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역사에는 자주 의로운 사건이 있었고 역사의 정의가 궁극적인 선(善)으로 선언된 것에 놀랐다고 했다. 베스타는 의로움의 원칙은 한국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선이 강조한 도덕성과 충실성을 주목했다. 한민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침략과 폭정에 저항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조선말 일어난 의병을 예로 들었다.

한국인의 역사문화에 담긴 의병혼과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과 같은 충성심 그리고 정몽주의 일편단심은 후대에 전해졌다. 백성들은 세조의 업적보다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이나 사육신의 절개를 기렸고 반찬거리 나물에는 변절자 신숙주의 이름을 붙여 숙주나물로 불렀다. 현대에는 유혈 집권으로 역사에 오점을 남긴 대통령도 정의라는 단어를 선호해 정당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주요국 정당 중에 정의의 이름이 붙은 사례는 별로 없을 만큼 한국인의 일반적 관념은 의로움과 정의를 지향한다. 이 점에서 조선의 초기 역사에는 남겨진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다. 불과 24년 간격으로 세워진 조선(朝鮮)과 명(明) 사이의 영역 획정 때문에 양국 관계는 대립과 협력의 양면성을 가졌다. 1368년 1월 건국 후 명은 요동에 일방적으로 철령위를 설치하고 조선에 점령 사실을 통보했다. 그리고 계속해 경고성 문서를 보냈다. 표전문제를 거론한 외교적 압박이었다. 표전은 조선에서 명에 보낸 외교문서인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이다. 외교문서이기 때문에 문장력과 격식을 갖춘 의전 절차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명은 이것을 조선에 대한 압박과 길들이기에 활용했다.

1392년 7월로 예정된 건국을 앞두고 이성계는 명에 사신을 보내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 하나를 국호로 정해 주도록 요청했다. 명은 '조선'을 국호로 정한 자문(咨文)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 후 명은 조선의 사신 파견이 늦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압록강을 건너 무위를 보이겠다는 침공 가능성마저 시사하는 위협적인 답서를 보냈다. 요동 국경에서는 조선 사신들의 입국이 거부되거나 구타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1397년 12월에는 문서에 명을 업신여긴 문구가 있다고 사신을 억류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정도전을 '화의 근원'으로 비난하면서 압송을 요구했고 억류되어 있던 3명의 조선 사신도 위기에 처했다. 태조 이성계는 억류된 사신 가족을 위로하고 명의 요구를 묵살했다. 표전은 명분일 뿐 실제로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 움직임 때문으로 1392년부터 1398년까지 태조는 정도전의 주도하에 사병 혁파와 정규군 체제를 확립하는 국방 개혁을 추진했다.

조선은 명을 사대(事大)의 예로 대하는 한편 국익을 포기하지 않았다. 유학자 관료들은 예가 아닌 줄 알면서도 요구에 무조건 따르는 것은 문명국가 조선의 위상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상국의 부당한 지시에는 예의를 갖추어 그 억울함을 설명하는 한편 강한 위세를 보여야 한다고 진언했다. 태조 7년인 1398년 윤달 5월 변중량(卞仲良)과 신하들은 국왕 이성계에게 "의롭지 않은 명령에 임시변통으로 우리의 의사를 굽혀 좇아 먼저 겁내고 약한 형세를 보인다면, 잇따라 따르기 어려운 명령이 있을까 염려되오니 그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라고 진언했다. 그리고 "원컨대, 변례를 따라서 이 3인을 머물러 두고 장계(狀啓)를 갖추어 그 원통함을 변명하고 한편으로 우리의 강한 형세를 보인다면, 구류된 사신도 빨리 돌아올 도리가 있을 것"이라고 상소했다. 국왕도 정도전을 압송해 보내지 않았고 억류된 사신들은 사망했다. 그리고 그해 음력 8월 정도전은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당시 스승을 살해한 이방원의 진의(眞意)를 쉽게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의 초기 대명(對明) 정책에 나타나 있는 것은 중국이 곧 중화 학문의 진리를 담은 국가는 아니라는 인식이다. 조선이 따르는 것은 중화 질서의 바탕인 성리학의 진리며 중국 황제의 명령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은 중국 대륙의 주인이 어떻게 바뀌건 갈등 중에도 사대 의례를 거행했고 유교 의례를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의를 벗어난 부당한 요구자는 중국이라는 점을 지적해 선제적으로 외교를 실행했다. 유학의 예(禮)와 의(義)에 기초하는 양국 관계의 규범 파괴를 거부하는 자주(自主)외교였다. 이러한 사실이 조선에서 신유학(Neo-Confucianism)이 발흥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조선은 중국의 3년 1사 파견 요구에 1년 3사로 맞섰다. 잦은 교류로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도입하겠다는 목적이다. 그리고 사신들은 수천 권의 서적을 구해왔다. 1844년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 생활 중에 그린 '세한도(歲寒圖)' 는 중국에서 가져온 귀한 책들을 선물해 준 역관 이상적에게 보낸 감사의 인사였다. 조선은 고육지책과 같은 의지로 습득한 지식과 정보를 활용해 조선의 것으로 재창조했다. 1400년 즉위한 태종 이방원은 2년 후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제작했다. 그리고 1687년 숙종 13년에는 우주천문도 '천상열차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제작되었다. 이것은 조선의 발전 의지를 담은 상징적 작품들로 후대에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리고 조상의 정신을 되살려 미래를 열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 후손들이 할 일이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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