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의 작가' 이배, 뮤지엄 산에서 30년 여정 펼쳐 오로스코, 리움미술관 야외 데크를 살아있는 정원으로
이배 개인전 전시 전경 뮤지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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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 개인전 전시 전경. /뮤지엄 산
국내외 두 거장이 각각 국내 대표 전시 공간을 새롭게 변모시키는 작업으로 올봄 미술계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숯의 작가'로 불리는 이배는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강원도 원주의 뮤지엄 산에서 개인전 '앙 아탕당: 기다리며(En attendant)'를 열고 있다. 30여 년의 작업 세계를 집약한 이번 전시는 회화·조각·설치·영상 등 39점으로 구성됐다. 멕시코 출신의 현대미술가 가브리엘 오로스코는 서울 용산 리움미술관의 야외 데크를 정원으로 탈바꿈시키는 장소특정적 프로젝트를 최근 공개했다.
뮤지엄 산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높이 8m, 무게 7t의 숯 기둥 '불로부터'가 시야를 압도한다. 불을 거친 숯은 파괴 이후 남겨진 물질이면서도 정화와 치유를 동시에 상징한다. 자연재해 이후에도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는 염원이 그 무게 속에 담겨 있다.
이배의 불로부터 뮤지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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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의 '불로부터'. /뮤지엄 산
전시 전반을 관통하는 개념은 '기다림'이다. 작가는 이를 완결되지 않은 상태를 견디는 태도이자, 결핍을 안은 채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로 설명한다. 전시는 완성보다 과정과 시간을 전면에 내세운다. 야외 전시장 '무의 공간'에 설치된 '붓질' 연작에서 검은 브론즈 조각은 산세와 조응하며 자연과 조형이 어우러진 풍경을 빚어낸다. 실내로 들어서면 수만 개의 스테이플러 심으로 구성된 벽면 작업이 시선을 붙잡는다. 멀리서는 하나의 흐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물질의 집적이 드러나며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배의 작업은 국내보다 유럽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1990년대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그는 낯선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기 위해 한국적 재료인 숯을 택했고, 이후 숯은 그의 예술 언어 그 자체가 됐다. 이번 뮤지엄 산 전시는 파리와 뉴욕, 홍콩 등 세계 무대를 누빈 작가가 오랜만에 국내에서 선보이는 대규모 개인전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자연과 건축이 하나로 어우러진 안도 다다오의 공간은 숯이라는 물질과 특유의 긴장 관계를 형성하며, 전시 전체의 분위기를 한층 깊게 끌어올린다.
이배는 "이번 전시는 근원부터 다시 돌아보는 데 집중했다"며 "내가 누구인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무엇을 꿈꾸며 여기까지 왔는지 되짚는, 스스로를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배 작가1_ⓒ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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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 작가. /뮤지엄 산
이배의 작업이 물질의 근원을 파고드는 여정이라면, 오로스코의 프로젝트는 공간을 다시 쓰는 실험에 가깝다. 그동안 대형 조각이 수직으로 놓이며 시선을 위로 끌어올리던 리움미술관 야외 데크는, 이제 관람객의 눈길을 발밑으로 낮춘다. 돌바닥의 원형 패턴을 따라 걷고, 식물 사이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관람은 '보는 행위'를 넘어선다. 소나무·대나무·매화가 심어진 정원은 계절의 변화를 머금으며 흐름 속에서 완성되는 작품이 된다.
리움미술관 야외 데크 서측 전경 리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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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미술관 야외 데크 서측 전경. /리움미술관
오로스코는 1990년대부터 일상의 사물과 자연 재료를 활용한 개념미술로 국제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해온 작가다. 장소의 맥락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그의 오랜 작업 방식이기도 하다. 이번 리움 프로젝트 역시 한국의 전통 정원 미학과 현대 미술관이라는 장소성을 치밀하게 읽어낸 결과물로, 단순한 조경이나 설치를 넘어 관람객이 공간과 맺는 관계 자체를 재편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야외 데크는 미술관 개관 시간 동안 무료로 개방된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화려한 기념비적 조형물이 아니라 지속되는 시간, 스펙터클이 아니라 인내가 이 정원 조각의 핵심"이라며 "세한삼우가 혹독한 겨울에도 푸른 생명을 지켜내듯, 이 정원은 가장 매서운 계절에도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변화하는 예술의 시간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